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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죽음 앞에서 헛된 지혜(전도서 2:12-17)

 

https://youtu.be/qJHmh1Vi6s8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땅따먹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많은 땅을 차지 한 아이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고,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을 성취하기라도 한 것인양 우쭐해 하며 잘난 체 하기도 하고, 적은 땅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는 큰 실수라도 한 것인양 풀이 죽어 어깨가 축 늘어지곤 했다. 그러나 뉘엿뉘엿 해가 지고, 어둠이 오는... 저녁시간, 엄마들이 제 각기 자신의 아이들을 찾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얻은 땅을 그대로 놔두고 빈 손으로 집으로 달려들어가곤 했습니다. 언제는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도, 아깝지 않을만큼 그렇게 소중하고 귀중했던 땅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집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땅따먹기로 즐거웠던 하루의 추억을 담아가고, 단지 내일의 놀이를 기약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삶이 그와 같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을 하며, 더 많이 가지려고 했던 세상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그것을 소유할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그것을 고백합니다. 빛이 어두움보다 나은 것처럼,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지만, 결국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똑같은 운명인 죽음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시간, 그 때는 손에 쥐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원한 집으로 달려가야 할 뿐입니다. 손에 묻은 땅의 흙을 툴툴 털어내고 집으로 가듯이, 그렇게 손으로 움켜잡았던 세상의 것을 툴툴 털어내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고를 만날 수도 있고 오늘 죽음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오늘도, 내일도, 내일 모레도, 아주 오래 오래도록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하고, 좀 더 많은 소유를 쌓고, 명성을 얻으려고 애를 쓰며,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로 싸움을 하고 분열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오늘 한 순간만 허락될 수도 있는,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 소중한 삶의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죄의 마음을 품고도 좀처럼 쉽게 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하려고 생각합니다. 땅따먹기를 하다가 마음대로 안 되면 화를내고 싸움을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모든 수고가 한 순간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입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살아갑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있지만 가난으로 힘겨운 사람도 있습니다. 지혜로 명성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어리석음으로 지탄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가 많은 사람도 있지만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고, 인기가 많은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거절 받는 외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각 각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유하고 살았는가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빈부귀천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에는 이 세상에서 누리고 소유하던 그 무엇도 가지고 갈 수 없고 빈손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허무함을 극복할 수 없는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오늘 말씀 전도서 216절에서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가 우매함보다는 훨씬 탁월하고 좋은 것입니다. 마치 빛이 어둠보다 뛰어나듯이 지혜는 어둠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213절에서 보면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유익을 줍니다.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혜를 신뢰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은 지혜를 쌓는다 해도 그것이 결국 헛될 수밖에 없는 것은 지혜자도 우매자도 모두 죽음 앞에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낼 수 없고, 인생의 허무함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지혜자이든 우매자이든 그들은 모두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예기치 못하게 닥치는 고난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있는 한 우리는 허무함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죽음이후의 영원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17절을 보면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의 삶을 미워한다고까지 표현 합니다.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괴로움뿐이고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땅따먹기의 놀이에 빠져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수고하고 애쓰고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잔머리도 굴리고 갖은 애를 다 써보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 그 모든 수고가 헛될 뿐인데 왜 그렇게 수고했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더 열심히 그것을 차지하려고 한 사람일수록 그 허무감은 더 클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음 앞에 서 있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허무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늘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써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한 영원의 관점에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듯 살아갈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끼고 헛됨을 느끼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만족한 삶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죽음을 넘어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오늘을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어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