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 삶의 기준인 다윗(사무엘상 23:1-14)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아십니까? 맹자는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이고, 그를 키운 어머니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의 집이 무덤근처에 있었는데, 어느 날 맹자 어머니가 아들이 어떻게 노는지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무덤을 만들고 곡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이 곳은 아이를 기를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시장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장 근처에 이사 온 맹자는 장사를 하며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맹자 어머니는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서당 근처로 이사를 가자, 맹자는 서당에서 가르치는 예절과 글 읽는 흉내를 내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곳이야말로 맹자를 가르치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서당 근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맹자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에서 나온 맹모삼천지교란 말은 교육에 있어서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집을 이사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교육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주위환경이었습니다. 결국 아들의 교육이 삶의 모든 것을 결정짓게 하는 기준이 된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든, 아니면 소소하고 일상적인 선택을 하든지 그들 나름대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돈을 모으는 것, 돈을 아끼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는 입장에 있어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돈을 지키려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맹자의 어머니처럼 자녀의 교육을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명예를, 건강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기준이란 다른 어떤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결코 포기하거나 놓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된 우리의 삶의 기준이고,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보고 결단하는 은혜를 누리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다윗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과 싸워 패배감과 두려움에 휩싸인 온 나라에 용기와 소망의 불을 지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송과 인정을 받아 마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시발점이 되어 왕권을 노린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를 죽이려는 사울의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아내였던 미갈조차 빼앗기며 '도망자'라는 이름으로 동굴 속에 유리하며 구차한 생명을 이어가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죄를 지은 적도 없이...생각치도 못한 오해를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또 그로인해...가까운 사람들을 잃어버리고..일자리에서 쫓겨나고..도망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사울의 오해와 추격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가야 했던 다윗의 마음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배신하고 깨뜨리는 사울의 공허한 약속을 믿고..생명과 전 존재를 걸어 헌신하고 충성했지만..결국...철석같이 믿었던 약속의 깨어짐으로 ..배신감과 억울함에 밤을 새워 본 사람이 있다면..아마... 그의 마음은..다윗이 사울을 통해 경험했던 깨어짐의 마음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도망자의 신세로 근근히 삶을 이어갔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움에 처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외면하지 않았던 다윗, 자신도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힘써 싸워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었지만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울의 호의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생명을 걸고 은혜를 베풀었던 다윗을 넘겨주려고 했던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이었습니다. 생명을 건 은혜를 베풀었건만 배신으로 가슴의 무너짐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마음 역시 다윗의 마음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등과 같은 엄청난 고통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고 깨어진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 분의 뜻을 겸손히 묻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삶의 기준,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어떤 삶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절망적이고 낙심뿐인 상황에서 그를 일으켜 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 살아가게 했을까요?
1) 자기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지역을 치고 그들의 식량을 탈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먼저 그일라 지역을 약탈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온통 시기와 질투에 마음을 빼앗겨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져서라도 다윗을 찾아내어 반드시 죽여 없애려는 사울왕의 추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다윗의 사람들, 부하들 역시 그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그일라 지역으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은 다윗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생명과 모든 안전을 잃게 만들 수도 있는 두렵고 위험한 일임을 다시금 언지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가야 했고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 역시 같은 입장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다 땅에 머무는 것조차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사울에게 잡혀 죽을지 모르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약탈하는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위치가 노출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하는 사울이 그들의 위치를 알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에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래 알았다. 너희들의 말이 옳다. 우리의 생명이 두 개도 아니고 하나인데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알았다. 그만두자.”라고 해도 그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말에 바로 수긍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순간에도,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 이야기 하든지 상관없이 그는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가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하기 위해 다시금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넘기겠다는 승리를 약속하시며 그일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확인한 다윗은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하며 시간을 지연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는 단지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그일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 죽이고 승리를 얻습니다. 자신의 생명이나 안전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의 순종은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되고 경험되어지도록 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는 전리품으로 가축을 얻고 그는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는 축복과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 우리의 계획과 많은 전략에 의해 보존되고 강화되는 것처럼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의 안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지켜집니다. 다윗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명이나 안전을 지키려는 노력이나 수고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 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 분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놀랍게 보호 해 주십니다.
2) 보이는 상황과 자신의 감정에 매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다윗의 사람들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사울에게 알렸고 그의 위치는 그대로 탄로가 난 것입니다. 어찌보면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청난 배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만약 그일라 사람이었다면 더 한 일이었겠지요. 목숨을 걸고 동족의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그 어떤 사람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사울에게 아첨하듯 달려가서 다윗의 거처를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뜻밖의 정보를 입수한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라고 말하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의 고백이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사울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왕좌와 왕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막은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고 범죄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상황과 환경을 해석하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사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삶의 기준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소견과 원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제한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사울과 같이 또 때로는 다윗의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 위해 질문하지 않고, 다만 우리의 원함과 뜻대로 돌아가는 상황과 환경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얼마나 자주 제멋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한 사람, 보이는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규정하지 않고,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서도, 또한 자신의 원함과 뜻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과 환경을 해석하고, 자신의 삶과 행위를 결단했던 오롯이 빛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상황과 환경을 변명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고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만 보고 판단한다면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에게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윗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그를 숨겨주어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나 환경을 보고 다윗은 안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어림짐작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일라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을 생각하며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여 그 곳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거니하고 주저하지 않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는 소식과 사울의 음모를 알고 곧바로 주저함없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늘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릴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이 내려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라는 다윗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는 청전벽력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은혜에 대해 배은망덕한 그일라 사람에 대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 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배신감과 분노와 억울함 라는 감정에 싸여 내가 죽든 말든 먼저 그일라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받은 대로 앙갚음하려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뜻보다 내 감정에 매여 휘둘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노하고 화가 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감정에 매여 상대에게 욕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얼마나 자주합니까? 배신감을 느끼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쏟아내는 일을 얼마나 자주합니까? 다윗도 분명히 배신감을 느끼고 억울한 감정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뒤로하고 자신의 감정에 매이지 않고 그의 사람 육 백명 가량을 데리고 그일라 지역을 떠납니다. 어떤 아쉬움이나 기대함도 없이 그는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이는 상황과 자신의 감정에 매여 주저앉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하고 그 분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다윗은 자기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감정에 매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하고 배신감도 들고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실망을 경험했겠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 분께 나아가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이 좋아 보일 때이든지 안 좋아 보일 때이든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림짐작하거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뜻을 물었고, 그 분의 음성을 들었고, 그 분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는 시간을 통해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집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항상 손해 보는 것 같은 인생이지 않습니까? 항상 억울하고 항상 배신을 당하고 항상 도망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삼상 23장 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그는 결코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도망자의 신세로 광야의 요새와 광야의 산골에 머물며 불편한 삶을 견디며 살아야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안전한 터전을 마련해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한 목숨을 걸고 구해준 사람들로부터 받는 부당한 대우를 생각하면서 억울함과 배신감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던 날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매일 그를 찾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불편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도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그를 찾아 헤매는 추격자 사울의 손에 다윗을 넘기지 아니하심으로 그를 보호하셨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셨으며 그의 피난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까지 하나님은 다윗을 다듬어가셨으며 더 철저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때에 그에게 왕권을 허락해주십니다. 그의 인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 안에서 보호되고 지켜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사울이나 다윗의 부하들처럼 보이는 상황과 되어 지는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재단하고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번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고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겸손히 질문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두 귀를 막고 보이는 상황에 자신의 원함을 투영하여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윗처럼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되는 일들이 어떠하든지 환경이 어떻게 열리든지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든지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의 뜻을 겸손히 구하고
그 분을 향해 귀를 열고 질문하며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달은 후에 그 분의 기준으로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해석하고 우리가 행해야 할 삶의 모습을 결단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을 생각나게 합니다. 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3:1-14
(23: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3: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23: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23: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23: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23: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23: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23: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23: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