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세상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전도서 3:16-4:3)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1862년에 쓴 장편 소설입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가족을 위해 힘겹게 일하지만 지독하게 가난했던 장발장은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 있던 조카들이 떠올라 빵 한 덩어리를 훔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몇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가중처벌을 받아 무려 19년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겨우 빵 한 개를 훔쳤지만 무려 19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단지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일들은 훨씬 더 비일비재합니다.
2014년에, 중국의 10대 소년, 후거지러투는 살인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사형에 처해졌고, 숨진 지 1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은 많습니다. 얼마 전 이춘재가 일으킨 연쇄살인 8차의 진범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출소 되었던 윤성여씨는 결국 무죄가 밝혀졌고, 정부로부터 18억원의 배상금을 받도록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어쨌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무죄로 밝혀진다면 천만 다행이지만, 사실 세상의 법정은 억울하게 판결 받은 사람들의 사정을 다 헤아려 주지도 않고 , 무죄를 밝혀주지도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지요?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된다는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해 아래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의합니다.
오늘 전도서 3장 16절부터 4장 3절의 말씀은 불의와 억울함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공의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공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재판조차도 정의 대신 악이 판을 치고 있고, 세상에는 불공정함과 불의함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사람들의 억울함은 하늘에 사무치게 쌓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전도서 3장 17절을 보면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정의로 재판하시고 심판하심으로써, 공의로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해 아래서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고, 기대를 사라지게 하는 불의가 넘치고 불공정하며 허무한 세상입니다. 공의롭게 이루어져야 할 재판이 오히려 악한 권력에 의해 뒤틀리고, 공의가 사라진 자리엔 불의한 악이 존재하며, 세상엔 억울한 학대가 일어나고, 학대받는 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위로자도 만날 수 없으니 이런 세상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고, 세상의 악을 보지 않아도 되는 태어나지 않는 자들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죄악과 불의가 넘치는 세상을 바로 바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심판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3장 18절입니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와 죄악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거나 하나님이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참으시고 심판을 지연시키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와 죄악을 허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정말 짐승과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직면하게 하셔서 진정 소망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호흡하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참으로 헛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한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은 비록 불공정함과 악과 억울한 학대로 인해 헛되고, 황폐한 곳이 되었으나, 반대로 언젠가(하나님에 때에) 악과 선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안에서라면, 또한 모든 것을 합력하셔서 자신의 선한 목적과 뜻을 이루어내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안에서라면, 그리고 억울하게 학대받는 자들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감찰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라면, 제아무리 헛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해도 자신의 일에 즐거워하는 복된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악이 있고 공의가 사라진 세상에서의 삶은 허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허무한 세상 속에서도 공의의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억울한 학대가 있고,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오히려 낫고, 태어나지 않는 삶이 오히려 나은 참혹하고 황폐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삶은 참된 만족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결코 헛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허무하고 황폐하며, 악이 가득하고 불공정한 헛되고 헛된 허무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삶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우시고, 소중한 가치로 넘치게 하시는 유일한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의함과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 3장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일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루,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즐거워하며 감당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일 것입니다. 오늘을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나은 삶이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불의한 상황에 있든지, 억울한 사정이 있든지 그 모든 것을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즐거이 감당하며, 모든 것을 공의로 재판하시고 바로 세우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