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십자가(롬 5:8)

하얀종이Lee 2023. 3. 25. 11:54

 
https://youtu.be/9bkrd-Fn8-s

 
 
제목 : 우리를 향해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5:8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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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으십니까? 사실 우리는 매순간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연인이나 신혼부부들은 서로에게 “자기 나 사랑해? 얼마만큼 사랑해? 그럼 보여줘 봐.”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상대에게 확인시켜주거나, 혹은 상대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랑이 참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매달립니다. 특히 아이들은 더 그렇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칩니다. 왜냐면 부모님의 사랑은 아이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향한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합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이 떠오릅니다. 그 집사님은 어렸을 때, 엄마가 항상 오빠만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힘이 없고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집사님의 귀가 아팠습니다. 오랜 시간 병원에 가도 계속 낫지를 않자, 엄마가 그 집사님을 큰 병원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이 아이의 귀가 평생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생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엄마는 한동안 말씀을 하지도 못한 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는데, 바로 그 때 이 어린 집사님의 마음에 ‘아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자, 자신이 평생 귀를 먹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내가 평생 귀가 안 들린 체 살아도 괜찮아. 엄마가 날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괜찮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가진 진심어린 사랑, 참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게 하고 이기게 하는 동기가 되고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사랑이 참된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진짜 사랑, 참된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하고, 가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많이 안아주고, 아낌없이 많은 선물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거나. 확신을 갖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고, 한 순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소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를 향한 누군가의 사랑을 확신하고, 또 누군가 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 사랑이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게 하고, 그 사랑이 삶에 기쁨을 주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사랑, 참된 사랑을 확증하며 살 수 있을까요?
 
김수형 작가가 쓴 “은빛여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잠깐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마을에 닭 도둑으로 소문난 은빛여우가 있었습니다. 이 은빛여우가 마을에 너무 큰 피해를 주자 은빛여우를 잡는 일에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은빛여우를 잡기 위해 꽤나 이름 있는 많은 사냥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은빛여우는 사냥꾼들이 잡기에도 너무나 똑똑하고 빨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은빛여우의 현상금은 황소 한 마리 값으로 뛰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우산 기슭을 지나던 가난한 범수 아저씨의 눈앞에 은빛여우가 나타났습니다. 범수 아저씨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아파 집에 누워있는 아들 녀석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저 은빛 여우를 잡으면 아들의 약값을 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범수 아저씨는 떨리는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 때 은빛여우는 고개를 돌려 범수 아저씨를 쳐다보았습니다, 워낙 빠르고 똑똑한 은빛여우라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빛 여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범수 아저씨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순간 은빛여우의 눈동자를 보다가 겁에 질린 범수 아저씨는 자신도 모르게 꼭 쥐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그 돌멩이는 정확히 은빛여우의 목덜미에 명중했습니다, 그런데도 은빛여우는 도망치지 않고 범수 아저씨를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무서움을 더 느낀 범수 아저씨는 미친 사람처럼 잡히는 대로 돌멩이를 집어 던졌습니다. 얼마동안을 정신없이 그렇게 던지자 은빛여우는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습니다. 범수 아저씨는 그 날쌘 은빛여우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범수 아저씨는 궁금해 하며 은빛여우에게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그때 돌에 맞아 죽은 은빛여우의 주검 앞에서 범수 아저씨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은빛여우 뒤로 덫에 걸린 새끼 여우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은빛여우는 자신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새끼를 버리고 도망칠 수 없었던 겁니다. 울고 있는 새끼 여우와 집에 아파 누워있는 아들의 모습이 범수 아저씨의 마음에 겹쳐지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은빛여우가 갑자기 마을에서 왜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범수 아저씨만이 한 달에 한두 번씩 여우 산기슭에 생긴 작은 무덤에 찾아갈 뿐입니다.

https://youtu.be/EbnrJ3ilCMY?si=JCrQ0u5gl7A2f1pk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게 되고,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조차 “바로 사랑은 이런 거야.”라고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은빛여우의 죽음을 통해 덫에 걸린 새끼 여우를 향한 사랑이 확증되었고, 은빛여우의 죽음의 자리가 바로 사랑이 확증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듯 사랑은 죽음에 맞닿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겠다고 큰 소리로 결심을 하는 사람의 외침도 우리에게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고, 사랑한다고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이야기하는 사람의 고백도 때로는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소리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죽음과 연결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가짜 사랑이라고 고개를 흔들곤 합니다. 우리도 매번 삶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로는 사랑을 수없이 외쳐도, 실제로 무엇 하나 내어주는 참된 희생과 헌신이 없는 가짜 사랑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공허하게 만들고 씁쓸하게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 로마서 5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진짜 사랑, 참된 사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 역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맞닿아 있고, 그 죽음으로 사랑이 확증 된 것입니다. 확증이란 무엇입니까? 확실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뚜렷하고 틀림이 없이 100% 참된 것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100% 참된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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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일은 나중 일이고, 먼저 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방황하면서, 참된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면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특히 삶의 고난 속에서, 홀로 외로운 삶을 견뎌야 했을 때, 힘겨운 삶에서 나를 견디게 해줄 그 참된 사랑에 대해 저는 늘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흔들렸습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그 사랑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특히 삶에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오고, 외로움으로 견뎌야 하는 어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흐릿하게 보였고,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은 더 희미해져갔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중심에서 저는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시기는 하십니까?”라는 짧은 질문으로 시작된 기도는 점차 간절한 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십시오.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 저는 왜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고난과 어려움들이 일어나는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혼돈스럽습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가 흘렀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저는 서운함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지 않고는 이 믿음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진리를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어리광처럼 떼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숙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내가 나의 하나 뿐인 아들을 네게 주었지 않았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은 이미 제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들어왔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만지고, 확실하게 들음으로 확신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저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확증해 주시길 바랐던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하지, 내가 나의 하나뿐인 아들을 네게 주었지 않았냐?”는 대답으로 주어진 그 말씀이 실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은 이미 확증되었다고 확신하시는 듯 침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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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여우가 덫에 걸린 새끼여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었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 연약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아무런 감격도 감동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천 번을 들어도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야 하는 그 사랑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이, 그 십자가를 통해 부어진 그 은혜가 가슴에 감격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는 그 말을 들어도 충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은 것, 더 확실한 것을 요구하고 또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면 충분하고 이미 넘치도록 확증된 사랑인데, 저는 그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믿으려고 하는 불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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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그리고 죽음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이 아닌 아들의 생명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제한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담고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가 저는 많은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적군의 포로로 잡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참혹한 전쟁터에 당신의 자녀 중 한명을 보내야 한다면 누구를 보내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거의 99%이상의 부모님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결코 내 자녀를 그런 고통스러운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내가 대신 가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님의 입술에서 고백되어진 것처럼 자식의 생명보다 세상에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식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보느니 내가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대부분 부모님들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자식의 고통을 보는 것이 자신이 고통을 직접 겪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더 소중한 더 귀한 하나 뿐인 아들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으로는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내가 나보다 더 소중한 내 아들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내 아들의 생명을 너에게 내어 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온 몸은 피로 물드시고 신음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닥다니”라고 절구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시고, 그의 고통의 신음을 들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게 찢기고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실 것이지만, 아들을 죽음의 고통에 내어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아들의 고통을 마주해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십니다. 왜요?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는 그 엄청난 두려움을 견디시고 이기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일서 4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온전히 이루진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확신하고 거침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835~39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되었고, 그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단단하고 견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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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하기 때문도, 우리가 특별한 것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로마서 5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이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은빛여우의 새끼가 덫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할 정도로 약해져 있고, 고통에 울부짖을 때처럼, 우리가 죄와 고통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의 편에서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한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우리를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은혜이고, 일방적인 사랑으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53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당시 가장 극악한 범죄자에게 만 내려진던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은 그 분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으로 그 분이 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고 두려움 없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맞으셨기에 맞은 자들의 아픔을 아시고 체휼하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음을 입고 하나님과 참된 화평의 교제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우리의 머리에만 머물지 않기 바랍니다. 매번 듣고 들어도 감격하지 않는 메마르고 진부한 이야기로 전락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이고 절교로 우리의 귀에 들려지고, 선명하고 분명한 사랑으로 보여 그 사랑을 거침없이 확신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나를 사랑하시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반복하면서 확인이 필요한 사랑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낸 온전한 사랑임을 십자가를 통해 확신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 사랑은 끝나지 않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러한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분께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죄와 죽음에 빠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고,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 존구하고 소중한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사랑을 확증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랑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확신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내어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건지시고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으로 마주하셨고 또한 견디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특별한 것을 소우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뿐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또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전부를 내어주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하며,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사순절의 시간을 주님 안에서 보내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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