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에레미야 29:11-13)

하얀종이Lee 2023. 6. 19. 22:00

제목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본문 : 예레미야 29:11-13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https://youtu.be/LuE_cmVNsec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에, 2명의 꼬마 아이들이 떠들면서 지하철 안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소란을 펴는지, 한 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승객들은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창밖을 응시할 뿐 전혀 아이들을 제지하지도, 꾸지람을 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수군수군하기 시작했지만, 그런데도 아이의 아빠는 그저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한 승객이 아이 아빠에게 아이들을 제지해서 조용히 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때서야 지하철 안으로 시선을 옮긴 아이 아빠는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습니다. "며칠 전 아이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오늘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인데,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서 미처 아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시끄럽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들은 지하철 안의 승객들은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아빠를 탓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도 그 이유를 알고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한 때 인터넷에 올려 져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이야기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일들을 마주할 때가 있고, “도대체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나조차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도 있고,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를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애써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황과 일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되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아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된 거였구나, 아 그래서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거였구나, 아 그래서 내가 그렇게 반응한 거였구나, 아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 것이었구나.”라고 무릎을 딱 치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정말 기적같이 간혹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부분적으로만 보고 알았던 것들을, 온전히 보게 되고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부분적으로만 보고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했던 우리의 오만한 생각이 산산조각 깨어질 때, 그런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람들, 그리고 내 자신과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 행했던 모든 불평과 원망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정죄만 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저 보지 못했던 것 단 하나를 보았을 뿐인데, 알지 못했던 것 단 하나를 알게 되었을 뿐인데, 그 하나를 보고 깨닫고 앎으로 인해 우리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그 하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오해하고,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할 때가 너무나 많았는데, 그 하나를 알게 된 순간,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모든 것을 다 견디고 참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을 만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때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만, 무엇을 알아야만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문제와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평안함으로 용납하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도, 이해할 수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보아야 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찾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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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된 예레미야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해 기록된 선지서입니다. 무너져가는 남유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고 개혁을 이루려했던 요시야 왕이 애굽의 왕 바로 느고에 의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왕하 23:29), 선지자 예레미야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어쩌면 요시야 왕은 하나님을 떠나 절망뿐이던 남유다 땅에 남겨진 유일한 하나님의 소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된 율법서를 읽고, 그는 애통함으로 죄를 회개했고, 유월절을 행하며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남유다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요시야 왕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했던 선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그 뜻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생각같으면, 남유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려 했던 요시야 같이 선한 왕,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재건하고 회복시키려했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은 더 오래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남유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거룩히 회복되도록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나라를, 백성을 이끌기 위해 애썼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전쟁터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니, 이는 안타까움을 넘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신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예기치 못한 고난이 엄습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만큼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재앙과 저주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가 더 큰 당혹스러움에 빠지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를 흔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에서는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결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요시야 왕의 죽음 이후에 남유다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길을 걷습니다. 주변을 둘러 싼 열강들의 침략과 간섭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경고와 권면을 한결같이 외면하고 거부하는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와 같은) 무능한 왕들로 인해 남유다는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는 길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요시야 같이 선한 왕,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 남유다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있는 왕은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왕들, 자기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멸망과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왕들이 남유다를 다스리는 것 역시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보면, 때로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다해 일하는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회사에서 잘라냅니다. 반면에 자기 욕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회사를 이용하고, 직장 동료든 부하 직원들이든 한낱 자기 야망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승진하는 웃지 못 할 상황,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종종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직장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저버린 어리석고 악한 왕들의 통치하에서 약 50년에 달하는 긴 시간동안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내내 예레미야의 삶은 그야말로 수난과 고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남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외치는 그에게 따르는 것은 온갖 핍박과 살해의 위협이었고, 그는 갖은 음모에 시달렸으며, 민족을 배반하고 나라를 바벨론에 팔아먹는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받았습니다(11:18-23, 12:16, 18:18, 20:1-3, 26:1-24, 37;1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고난을 직면하면서 때때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감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들을 쏟아내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처절한 울부짖음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갔을 뿐인데, 인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되고 온갖 구설수에 오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음으로 기도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의 삶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수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여전히 멈추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계속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에서도 멈추지 않고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메아리처럼 아무런 회개의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멸망당하는 남유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들의 비극을 보면서, 예레미야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해야 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을 토해내는 것은 어쩌면 예레미야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20:9).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내내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서 마침내 거기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니, 삶의 마지막 역시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삶을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고난과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충실하게 사명을 감당함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주 절망하며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고, 죄악과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을 향해 돌아오라는 외침의 소리를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멈추지 않고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한 사람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한사람도 돌이키는 것 같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통해 일을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불평을 토로하고 원망을 쏟아내도 하나님은 일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는 사람들, 전혀 반응하지 않는 무감각한 사람들, 오히려 하나님께 비난을 쏟아내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분은 여전히 손을 뻗으시고, 소리를 높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도무지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명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매일 매 순간 이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하나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난븍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돌아오라고 외치시면서 결국 남유다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우리는 때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으니까요.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레미야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그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를 통해멈추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이나...용서해 주실 것도 같은데 결국은 남유다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모습들... 어쩌면 예레미야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그 모든 것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주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삶과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사명의 감당하는 인생의 길 위에서 기록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들 속에서도 어떻게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용납하고 견디고 받아들이고 참으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그를 지켜준 것은 무엇일까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 있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게 한 것,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고 참고 인내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보게 된 한 가지, 그가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의문을 쏟아내고 질문 하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함께 오늘의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가 끝까지,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그 사명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본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이 펼쳐지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 닥쳐오고,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다른 일들과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견딜 수 없는 문제 앞에 서게 된다 해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기 원하시며,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합력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전능하시고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요동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상황이 나쁘면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는 나쁜 하나님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축복하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다르게 인식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참으로 혼돈스럽게 할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믿음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통해 상황과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본심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일들을 마주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요동하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령 우리의 눈에, 우리에 생각에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고 어려운 고난의 문제가 주어진다 해도,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이 있기에 전혀 요동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내고 우리의 감정을 토로하는 기도를 할 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납득할 수 없는,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순간에서도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면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더 좋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문제와 어려움을 해석하면서 여전히 평안함과 고요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무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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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퍼즐을 맞춰 보신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퍼즐을 직접 맞춰보시지 못했을지라도, 자녀들 혹은 손자, 손녀들이 조막만한 손으로 조각 퍼즐을 가지고 열심히 맞추는 모습을 보신 적은 있으실 것입니다. 150, 500, 1000, 2000 등 다양한 피스로 구성된 조각퍼즐이 있는데, 피스 즉 조각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그 조각이 피스가 작으면 작을수록, 퍼즐을 맞추고 완성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모든 조각을 다 맞추고 나면 근사한 그림이나 사진으로 완성되지만, 그 조각들을 다 맞추기까지는 수많은 생각이 필요하고, 조각을 안성하기까지 과정이 어렵고 힘들어서 종종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각퍼즐을 사면 그 상자 안에는 퍼즐조각들 뿐 아니라, 그 조각이 다 맞춰졌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완성된 그림이나 사진을 담은 종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종이는 조각들을 맞추다가 헷갈리거나 어려울 때 대략적인 조각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있어서 매우 쓸모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예전에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살펴본 것처럼, 그 종이를 보면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고 각 조각들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자리를 찾아내는데 아주 도움이 되기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때로는 조각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퍼즐의 한 조각과 같습니다. 조각 하나 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고, 자기 자리를 잡은 조각들이 모여 온전한 그림과 사진이 완성되듯이, 우리의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 각 자의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각 퍼즐을 맞추다보면 이 조그마한 조각을 어디에 놓을지 몰라 헤맬 때도 있고, 올바른 위치를 찾기 위해 고민할 때도 있고,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맬 때도 있고, 조심스레 많은 생각과 고민에 빠져 잠시 삶을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한 조각 한 조각을 맞추어가야 할 때 도무지 이 조각을 왜 여기에 놓아야 하는지 이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마침내 모든 조각이 제 자리를 찾고 다 마쳐져서 완성된 그림을, 또는 완성된 사진을 보게 될 때면, 그 조각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렇듯,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지, 왜 이런 문제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왜 내가 여기서 살아가야 하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상황을 그 문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왜 그 순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상황들이 펼쳐지고, 왜 그 순간 그 사람을 만나고, 왜 거기에 내가 서있어야 하고, 왜 그런 일을 했어야 하고, 왜 그런 고통을 만나 힘겨움으로 견뎌야 했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조각퍼즐을 맞추다가 이 퍼즐 조각을 어디에 놓을지 몰라 혼돈스러울 때, 완성된 그림 종이를 꺼내 보고, 다시 조각 퍼즐을 맞추어 가듯이, 삶이 요동할 때, 불안과 두려움에 싸일 때,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혼돈스러울 때, 우리에게는 다시 기억해야 하고 다시 새겨야 하고, 다시 보아야하고 다시 깨닫고 알아야 할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함께 읽었던 오늘 본문 예레미야 2911절 말씀을 읽으면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도 여전히 평안함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것”,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예기지 못한 문제에 휩쓸려 갈 때에도, 아무리 둘러보아도 절망뿐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가 믿어야하고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재앙처럼 보이고 절망처럼 보이고 의미 없는 고난처럼 여겨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선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고 우리는 전체를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하나님을 오해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상황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기에, 여전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있기에, 여전히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에, 눈에 보이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는 우리의 시도는 멈춰져야 합니다. 대신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 우리에게 재앙이 아닌 평안과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영적인 눈을 열어야 하고, 그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고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임을 알고 믿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있고,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절망뿐인 문제 앞에서도 오히려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다 알 수 없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을 때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우리는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잇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