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히 11:32-40)

하얀종이Lee 2023. 11. 7. 15:28

 

https://youtu.be/x8gNeA9SIxU?si=mukvHIQqifo8FwAc

 

 

제목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

본문 : 히브리서 11:32-40 

 

전남 여수에 애양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소록도가 생기기 전 손양원 목사님이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이 애양원에 손 목사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봉투 하나가 유리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순교를 당한 직후 장례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바쳤던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그 봉투의 겉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와중에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두 아들을 한 순간에 잃은 인간적인 아버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터이지만, 그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죽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의 장례식장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감사의 고백과 함께 장례 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슬퍼하기보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고, 장례식 후에 감사헌금 1만 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드린 이 헌금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고작 80원이었고. 만원이면 손양원 목사님이 10년 하고도 5개월동안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엄청난 가치의 돈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마침내 그의 기도처럼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나중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기적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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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갖기도 하고,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도전을 받기도 하고, 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 상황에서 저런 감사의 고백이 가능할까? 저런 일이 내게 일어나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까? 두 아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죽인 죄인을 먼저 품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라는 여러 생각들이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을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우리 성도님들을 보고 그들의 고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벅찬 감동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에 우리 주변에 암으로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의 여정을 걷고 계시는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사실, 성도님들이 암 진단을 받았다고 소식을 전해주시거나, 자녀나 가정이나 재정적으로 관계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이 놀라지 않거나 무겁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난과 어려움의 순간을 감사로 견디고 이기면서, 두려움보다는 평강으로 이 시간을 믿음으로 걸어가고 계신 우리 성도님들의 삶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고, 마치 기적에 대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 한 가슴 벅찬 놀람과 감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집사님이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분명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치료의 과정 역시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면 감사보다는 원망이나 불평이 나올법합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하필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의심어린 질문을 던지며 절망으로 주저앉아 있을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암 제거 수술을 받은 후 바로 다음 날 아침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카톡이 왔습니다. 우리 중보기도팀 카톡방에는 올려드렸는데요.

 

많은 분들의 걱정과 응원덕분에 평안한 마음으로 수술 잘 받았습니다. 정말 너무 다행히 림프전이도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남에 감사가 넘칩니다. 아픔을 즉시하게 하시고, 생각지도 못한 도움으로 이끌어주시고, 좋은 의료진과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많은 분들의 기도로 평안을 주시고, 가정이 더 단단하게 하시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치료과정도 기도하면서..감사함으로!!! 이 또한 은혜 안에서 지나가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난 중에 이런 감사가 우리 집사님들과 권사님들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의 과정을 밟고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가 동일한 감사를 고백을 해 왔고, 두려움과 불안보다는 평강과 평안으로 그 시간을 지냈고 그 과정을 지났노라고 한 결 같이 이야기 하시는 것을 저는 계속 들어왔습니다.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자녀나 여러 가지 삶의 문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면서 걸어가는 많은 믿음의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 안에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가가 막힌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고백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붙잡고 나아가는 의연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제 삶에 그런 고난과 어려움이 오면, 저는 그렇게 감사로 반응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저의 믿음보다 훨씬 앞서가고 계신 것 같아 때로 제가 이런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부끄러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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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즉 믿음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단락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서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그들의 삶을 승리하며 살아간 인물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들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럼 이들은 어떻게 승리하는 삶을 살았고, 강한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었는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용사로 세워져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읽은 1132-40절까지의 말씀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일까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고, 그들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말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말도 안통하고, 갖은 방법으로 회유를 하고 위협을 해봐도 전혀 요통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고집스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 보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세상의 방법으로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세상의 언어로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죽음으로도 도저히 그 믿음을 흔들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가는 믿음의 길을 중단시킬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그들과 세상이 바라보는 곳, 지향하는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과 세상이 원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믿음 안에 있다면 우리는 모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세상의 수단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고 상황이 감당이 안 되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지, 사실 믿음 안에 있다면, 믿음이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이나 고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11:32~38)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본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 우리가 생각하기에 엄청난 믿음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한 후에 마침내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한 삼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쩄든 오늘 본문에 나온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이방인들의 진을 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동일한 믿음으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사람도 있었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와 성공만을 준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때로 성공과 승리를 만나기도 하고 반대로 또 때로는 고난과 환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어떤 성공도 우리를 묶지 못하고, 그 어떤 고난과 환난도 우리를 묶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승리도 믿음의 사람들을 흔들지 못하고, 고난과 환난도 그들을 주저앉히지 못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도무지 그들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그릇에 그들을 담기에 그들이 너무 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와 저 믿음의 사람을 봐. 하나님이 엄청 축복하셔서 저렇게 많은 돈을 벌었네. 믿음대로 사니까 자녀들이 다 성공했네. 믿음으로 사니까 질병이 다 나았네. 믿음대로 사니까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문제가 다 해결됐네.”라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부러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대로 사니까 그 많은 돈을 벌고도 욕심 없이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네. 믿음으로 사니까 성공하고도 하나도 우쭐거리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네. 믿음으로 사니까 어떤 영광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다른 이들을 섬기네, 와 저 사람을 봐. 저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도 오히려 평안하고 오히려 감사로 지내내.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찬양을 하네.”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성공이든 실패든 승리든 고난이든 환난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이전과 동일한 믿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에 실패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믿음으로 의연하고 담대하게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도 고난도 그들을 흔들거나 요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공에 처하든, 고난에 처하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겸손함과 감사함과 평안함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여전히 배우자를 사랑하겠습니까? 묻는 결혼예식의 서약처럼, 우리의 믿음은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승리할 때나 고난과 문제로 무너질 때나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상황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문제와 고난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선하시고 얼마나 좋으시고 얼마나 신실하시고, 얼마나 위대하시고 전능하신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얼마나 안달하시는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성공이든 실패든, 고난이든 어려움이든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성공보다 더 큰 성공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보다 더 큰 상급은 바로 우리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는 세상에서 누리는 성공과 승리보다 또한 세상에서 겪는 고난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 뒤에 감추어진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 속에서 머리털 하나 타지 않는 은혜,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은혜를 누리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은혜를 누린 것처럼, 고난은 믿음의 사람들을 무너뜨리거나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기적의 은혜는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기에 어떤 성공이나 승리도 그들을 교만으로 이끌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성공도 어떤 고난도 그들을 흔들지 못합니다. 결국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성공할 때 또는 반대로 실패하고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바라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믿음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성경속에서 모세와 다윗이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할 때에, 홍해바다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홍해 바다를 앞에 두었을 때, 애굽의 바로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홍해바다를 보면서 이제는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모세는 그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말씀에 따라 홍해를 향해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어 뻗을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는 엘라 골짜기에 간 다윗은 그곳에서 적장 골리앗의 겉모습과 힘에 눌려 있던 형들과 다른 이스라엘의 군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나가서 적장 거인 골리앗을 넘어 뜨리지 않았습니까?

 

모세나 다윗은 모두 승리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노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도 사울의 쫓김을 받는 도망자의 신세에 처해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도우러 그일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다윗으로 인해 그일라 사람들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이 그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일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의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함으로 다윗을 배신합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일라 지역을 떠나게 됩니다. 다윗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지만 겉으로만 보면 실패자의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그의 외적 상황이 어떠하든 그는 여전히 믿음의 삶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상황이 승리자 성공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든, 또는 실패자 도망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든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삶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실상 믿음의 사람들은 문제가 있냐 없냐, 성공했냐 실패했냐에 따라 판단되어지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든 없든,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그가 여전히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2)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부활을 믿기에 죽음조차 이길 수 있습니다.(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폴리갑(AD 80-165)은 안디옥 출신의 사람으로 예수님이 사랑하던 제자 요한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고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으나 아첨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었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자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낭ㄴ 짐승들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갔습니다. 박해가 휩쓸고 지나갈 때, 폴리갑을 죽이기 위해 군중들이 들끓었지만, 폴리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폴리갑이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기도 중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고 꿈에서 깨어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 즉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불 길 속에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폴리갑은 추적하는 무리들 때문에 다른 곳에 피신하게 되지만, 그들을 더 이상 피하지 않게 됩니다. 폴리갑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위해 그는 제자들에게 식사를 준비하게 하고 마음껏 먹인 후,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를 잡은 무리들은 폴리갑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재판관 즉 총독 앞에 섰을 때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를 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 분을 섬겨 왔는데, 그 동안 그 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그러자 총독이 말합니다.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고.” 폴리갑이 대답합니다.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 뜻을 굽히지 않는 폴리갑을 향해 총독이 마지막으로 위협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시키겠소.” 그러자 폴리갑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 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고. 왜냐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의 얼굴은 오히려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총독의 위협에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폴리갑을 산 채로 태워 죽이라고 소리쳤고, 군중들은 장작과 밀짚을 모아다가 단을 만들고 폴리갑을 그 위에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그 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그 분은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이요.” 그들은 그에게 못을 박지 않고 그냥 말뚝에 묶여 화형 시키게 됩니다.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평생 죽음이 두려워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죽지 않기 위해 돈에 노예가 되고,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죽지 않기 위해, 그 죽음을 조금이라도 연기하려고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어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주님이 예비해 주신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고, 또 다른 세상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부활의 삶을 바라보고, 또 지금 이 세상에서도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까지 것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덤벼드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죽을지라도 죽음 이후에는 더 좋은 부활이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며 세상은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 죽음너머 부활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는 더 좋은 부활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죽을 것 같은 문제와 고난과 상황에 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나 고통이나 환난이 엄습한다할지라도 겁내지 마십시오. 심지어 죽음이 지금 우리 앞에 마주하고 있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좋은 부활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죽음 너머에 부활,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좋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약속을 믿고 바라봅니다.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이, 또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 더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어떤 고난에서도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약점과 강점, 성공과 실패, 깨어짐과 무너지는 모든 순간, 모든 삶의 여정, 모든 경험들, 모든 것을 합력하셔서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 매이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 더 선한 것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어질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자들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그 무엇이 아무리 좋다 해도 마음을 두거나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탐하거나 그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천국을 바라본다고 말하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믿음을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하고, 건강을 보장하고, 승리를 보장하는 부적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더 탐하고 더 욕심내고 그것을 갖기 위해 싸움이나 전쟁도 불사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면 전부인 사람들, 세상을 감당하지 못해 넘어가고 주저앉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이 천국인양, 이 세상이 전부인양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 하나님이 말씀하신 더 좋은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두렵지도 않고 세상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어떤 성공에도 우쭐대지 않고, 어떤 고난에도 낙담하지 않으며, 모든 순간 하나님이 주신 기적임을 믿고 감사하는 삶, 죽음 너머 부활의 삶을 바라보며, 지금 받는 고난을 통해 축복을, 지금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생명을 주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삶, 그리고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결코 이 세상이 담아낼 수 없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손잡고 나아가는 믿음의 삶,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분들, 여기 앉아계신 성도님들 한분 한분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이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이 만만히 보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 세상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들, 세상에 주눅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으로 주눅들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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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11: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