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마가복음 9:14-29)

하얀종이Lee 2024. 3. 9. 09:12

 

https://youtu.be/8L4YxWyUous?si=jTRFATlJ95N2_waW

 

 

제목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본문 : 마가복음 9:14-29

 

(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9: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9: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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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월에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뉴스에 방송되었습니다. 아마 우리들 중에 그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택시 운전기사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그 택시에 탔던 승객 두 명은 119에 신고도 하지 않고 비행기 시간이 급하다면서 현장을 떠나버린 사건입니다. 그 후 그 운전기사는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심정지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당시 뉴스에서는 출근길, 차량들이 정체를 빚으며 꽉 막혀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건의 현장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길 한가운데엔 트렁크와 차 문이 열린 택시가 앞부분이 찌그러진 채 정차해 있고, 앞에서 달리던 외제 승용차도 후미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사건이 있던 날, 오전 840분쯤 대전 서구 한 도로에서 택시 기사 62살 이 모 씨가 승객 두 명을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앞차를 추돌하고 30m가량 주행이 이어졌습니다. 운전기사 이 씨는 사고 직후 얼굴이 창백해진 채 침을 흘리며 기절한 상황이었지만 차량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119 신고는커녕 어떠한 구호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트렁크에서 자신들의 골프 가방과 짐을 꺼낸 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습니다. 결국 현장을 목격한 다른 분의 신고로 뒤늦게 운전기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고 발생 4시간여 뒤에 경찰과 연락이 된, 당시 택시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일본으로 골프 여행을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공항버스 시간이 10여 분밖에 남지 않아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해명을 하며 연락을 해왔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의 가치가 누군가에겐 골프여행보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생명이 누군가에게는 돈 몇 푼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 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사건이 지금은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때의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매일 매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태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압사 사고로 죽어갈 때, 그 옆에서 여전히 술을 먹고 춤을 추며 음악을 더 크게 틀라고 소리치는 청년들과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얼마 전 구로구에서 있었던 묻지마 사건으로 사람이 잔혹하게 죽어가는데도..그 쓰러진 피해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던 54명의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 우리 역시 그 들 중의 한 명,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전혀 감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죽을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누군가의 마음은 산산 조각나서 찢겨지고 절망가운데 있고, 누군가는 처참하고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 비참함으로 울부짖어도, 누구하나 그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종종 이런 세상을 경험하곤 합니다. 내가 아파도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소리 내어 울부짖어도 나와 같이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런 곳이 지옥이 아닐까 합니다. 나만 아니면 되는 세상, 나만 고통스럽지 않으면 되고, 나만 아프지 않으면 되고,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되고, 내 자식만 아니면 되고, 내 자식만 성공하면 되고, 나만 부요하면 되고, 나만 잘 먹으면 되고, 나만 인정받으면 되는..그렇게 나로 똘똘 뭉쳐진 세상, 바로 이런 곳에서 우리가 살고, 우리 자녀가 살고, 우리의 손자손녀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만 아는 세상, 자기가 왕이 되어버린 세상 바로 이 곳이 지옥이 아닐까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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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의 그들은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아니 광채가 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본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의 본체였던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위에서 예수님의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이 기이한 것이 아니라, 그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이 초라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겐 놀라운 소식이고 기이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그저 그 영광 가운데 머물러 있고 싶다고 말하며, 그 영광에 취해 있었던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비워 낮은 자리로 겸손의 자리로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산 아래, 그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산 아래에서는 많은 무리들이 산 아래 남겨져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그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상황은 이렇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한 아버지가 산 아래 남겨져 있던 제자들에게 와서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었던 서기관들은 변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쫒는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셨는데 자신들은 할 수 없었던 귀신을 내어쫒는 그 능력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그 어린 아들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더 돋보이게 할, 자신들의 이름을 더 알리고 사람들에게 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그 능력에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기만 하면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도만 하면 없던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기도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기도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되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삶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쩌면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한 아버지의 기도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과 함께 아파하며 함께 그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여기저기서 꺼꾸러지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질 때, 누가 그 아들을 보고 함께 울부짖으며 아파하겠습니까?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귀신에 잡혀 있으니 아버지의 삶도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불쌍해서, 그 아들의 고통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서 그 아들을 고쳐보고자 아들을 향한 긍휼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고, 아버지는 결국 산 아래 남겨진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의 고통을 멈춰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서기관들 그들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기는커녕 변론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귀신들린 아들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처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 우리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어떻게 제어하거나 통제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 또는 육신의 질병으로 아파하는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보고, 또는 죄악에 묶여, 돈에 묶여, 정욕과 두려움에 묶여 삶의 소망을 잃고 파리해져 가는 가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우리 역시 함께 울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병으로 신음하는 성도들의 아픔을 보고 어찌할 바 모르는 긍휼의 심령으로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날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아버지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한 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예수님께 간구하도록 한 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한 것은 바로 아들을 향한 긍휼함이었습니다. 아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아들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어, 그 아들과 함께 고통하고 신음하는 아버지의 그 긍휼한 마음이 바로 그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 또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으로 자신이 부정해질까 아무도 만지지 않는 문둥병자의 손을 잡았고, 가이사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에 있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외면당한 삭개오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의지할 이 하나 없던 외로운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 그녀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긍휼함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의 시작이었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기도의 동기였습니다.

 

이런 긍휼함이 우리에게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 역시 이 긍휼함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러한 긍휼함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능력으로 열매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외면하고 나를 죽이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는 이 긍휼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기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영혼에 대한 긍휼 없이, 내가 능력 받고, 내가 인정받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 드려지는 기도는 그렇게 무력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은 마침내 예수님 앞으로 그를 이끌었고, 예수님은 그 아들을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긍휼함으로 나아가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우리 뿐 만 아니라 고통 받는 자녀를, 죄악과 욕망에 매여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족을,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을 예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아들을 잡고 있었던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자,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처참한 몸부림을 보시고 예수님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십니다. 어릴 때부터 그 고통에 사로잡혀 살아갔던 아들, 삶이 삶이 아니었던 그 아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다시금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버지는 이제 그가 간구해야 할 바른 대상을 찾았습니다. 여기저기 부탁하고 간청해 보았지만, 그 누구도 귀신을 내어 쫒을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었지만, 그 누구하나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아들을 향한 불쌍히 여김과 긍휼함도 없었습니다. 아들을 고쳐보려고 이런 저런 시도는 있었지만, 이러쿵 저러쿵 변론과 말은 많았지만, 그것은 고통당하는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가 높임을 받으려는 시도였고 몸부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함은 마침내 그를 예수님 앞으로 끌어갑니다. 긍휼함으로 그 아들을 바라보시는 그리고 능치 못하실 것이 없으신 예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도 매달려 보았지만 그 누구 하나 아들을 사로잡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그 누구하나 아들을 고쳐주지 못해서 어쩌면 이 아버지의 마음에도 예수님도 못하실 거야 라는 의심과 불신의 마음이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기도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불신을 보게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가복음 9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어쩌면 기도는 능력을 얻는 자리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를 높아지게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하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기도는 우리의 불신을 직면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고 더욱 주님께 매어 달리도록 우리를 도전하는 자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도 같았는데 진정 자신의 믿음 없음을 본 아버지는 더욱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간구합니다. 924절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도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실상 나의 믿음 없는 실상을 마주하고 믿음 없는 나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친히 도와주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사모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 믿음도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번도 귀신을 내쫓아 달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능력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자신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고, 자신을 비워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갯세마네 동산에 오르신 예수님이 드린 기도, 고민하여 죽을 정도로 힘겨운 심정을 가지고서 드린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639절부터 44절까지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26: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일까요? 바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과 사랑이 기도의 동기였고,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의 죄로 인한 우이의 고통과 상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에 매여 끊임없이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의 악함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영광의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천한 마구간의 말구유로 오셔서 가난해서 초라해서 힘이 없어서 멸시당하고 배척받는 낮은 자들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슨 일을 당하셨습니까? 고민하여 죽을 정도가 되었으니 함께 깨어 기도하자던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졸고 있었던 제자들을 보시며 홀로 죽음 앞에 서서 기도해야 하는 극한 외로움을 경험하신 분이었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다던 맹세하던 제자들에게 의해 부인당하고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저주했고, 돈 몇 푼을 가지려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짓으로 고소당했고, 억울하게 누명쓰고 십자가형이라는 불공정하고 불의한 극형을 언도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 분의 몸은 날카로운 납덩이가 달린 채찍에 찢기도록 맞아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버림을 받아 당시 극악무도했던 죄인 바라바보다 더 나중이 되셔야 했고, 그 분의 옷은 찢겨졌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져 극도의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가장 낮은 그 무덤까지 내려갔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향해 창자가 비틀어지는 긍휼함의 고통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왜냐면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의 죄악으로 입해 당하셔야 했던 그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신 것은 우리들 중 누군가는 누군가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받으신 그 고통을 받게 되리란 것을, 그 아픔을 경험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 예수님에게 행했던 그 죄악을, 예수님을 상하게 하고 찢게 하고 심지어 죽게 한 그 죄악을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배신을 당했습니다. 일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서약을 깨뜨리고 돈 몇 푼에, 자기 욕망을 위해 우리를 버렸습니다. 또 누군가는 거짓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삶을 살기도 할 것이고, 반대로 누군가는 거짓으로 다른 이를 누명씌우고 억울하게 만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쇠덩이가 달린 채찍과 같은 도구로 살이 찢기고 멍이 들도록 매를 맞은 분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잔인무도하게 때린 분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왕따의 아픔으로 세상을 마주할 힘을 잃어버린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반대로 누군가를 거절하고 왕따시켜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누군가의 가슴에 남긴 분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성적이 수치감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누군가는 그런 상처를 주는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죄와 고통에 엉키고 설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와 허물로 살아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그 죄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이 동기가 되고 근원이 되어 그 분은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이러한 긍휼이 우리의 기도의 동기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마침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길 원합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은혜를 입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기도가 우리 자신이 높아지고 강해지고 능력을 얻고 성공하는 수단이 아닌 우리의 삶을 통해 죄와 하물로 죽어진 자가 다시 살아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고, 귀신에 사로잡힌 자가 자유케 되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용서하고, 화목하지 못한 자가 화목케 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기도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말 안 듣는 자녀들 남편들, 게임에 중독되고 세상에 중독된 사람들, 자기 욕망을 쫓아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병든 사람들, 죄에 매이고 욕망에 매여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이 불쌍하십니까? 그들을 향한 불쌍한 긍휼함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믿음 없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기도를 통해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기도를 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 사단에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살려낼 길이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야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걷게 해달라고!! 우리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 외에는 사단을 이길 수 없고,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음을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24, “승강장에 다리 끼인 지체장애인시민 30명 힘 합쳐 구해냈다.”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2022416일 오후 6시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전동차에서 하차하려던 지체장애인의 오른쪽 다리가 승강장 사이 틈에 끼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당시 문 가까이에 있던 남성 승객 몇 명이 사고자의 다리를 빼고자 시도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해당 칸에 있던 승객 30여명이 나와 약 10분간 함께 전동차를 밀어냈습니다. 시민들의 사투 끝에 사고자의 다리가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는 곧바로 역무원과 구급대원들에게 인계돼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장에 있던 김 모 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엔 몇 명의 승객만 전동차를 밀었지만, 점점 사람이 많아지더니 30여 명이 다 함께 구호를 맞춰 도왔다. 아비규환인 상황에서도 모두 한뜻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같은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승강장에 다리가 끼어 어려움을 겪는 그 지체 장애인의 고통을 누군가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함께 힘을 모은 긍휼함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긍휼함이 모어 주님께 기도로 드려질 때, 전능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