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삭개오(누가복음 19:1-10)
https://youtu.be/3gmTdNW7dCw?si=Gz0ARqDL-nQgqHLy
본문 : 누가복음 19:1~10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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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습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유길채라는 여인과 이장현이라는 사내의 사랑과 삶을 그린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안타깝게 어긋나고 결국 길채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길채는 청나라에 끌려가 오랑케에게 욕을 당하게 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오랑케에게 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결국 그녀를 사랑했던 남편에게까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길채는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장현에게 가는 것에는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현에게 떳떳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채를 향해 장현이 말합니다, “아직도 날 모르겠소? 내 마음을 그리도 모릅니까? 난 그저 부인으로 족합니다. 가난한 길채, 돈 많은 길채, 발칙한 길채, 유순한 길채, 날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날 사랑하는 길채, 그 무엇이든 난 길채면 돼.“라고 장현이 말을 합니다. 그러자 길채가 말합니다 ”허면 오랑케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그 때 장현이 떨리는 길채를 향해 말합니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테니.“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다 끝났고.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난 이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이 날 밀어내도 난 여기, 당신이 내게 싫증내도 난 여기 있겠소.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알게 됐지, 난 한 번도 그대 아닌 다른 사람 원한 적이 없었다는 거.“
저는 이 드라마를 좋아했습니다. 주말이 되면 기다렸습니다. 이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있으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의 모습이 이 드라마를 통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대사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대사입니다.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내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못난 짓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말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멸시한다고 해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며 나를 지켜주고 나를 사랑하겠다는 말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랑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적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처벌하면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겉모습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진정한 사랑뿐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 받는 자이기에, 인정받은 자이기에, 용서 받은 자이기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용서받은 자답게,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허물, 나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더 많은 돈을 많이 벌면, 더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성공을 하면 사람들이 날 사랑해줄까? 노심초사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소진해 왔는데,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자인지를 깨닫게 되면,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못나고 부족해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진정한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을 받으면 변화되지 않을까요? 사랑받은 자답게 우리는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지 않을까요?오늘 함께 읽은 본문 통해 우리는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삭개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삭개오는 어떻게 그런 변화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된 것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또한 그 동일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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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 그는 세리장이었으며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키가 작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하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탈하여 돈을 챙겼기 때문에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세리 중의 세리 장이었고, 부자였으니, 얼마나 많은 돈을 세금으로 징수했는지 알만합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김 바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탐욕스러웠고, 동족을 배신한 체 자기 탐심을 채우려고 로마제국에 빌붙어서 자기 부를 축척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사람들은 그의 작은 키와 볼품없는 외모를 보기만 해도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다보니 어느 누구하나 그와 어울리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삭개오 같은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여기기보다는, 삭개오와 같이 탐욕스럽고 볼품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삭개오를 따돌렸듯이 그를 따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리장이고 부자인들 삭개오에게도 고통이 왜 없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 사람들에게 용납 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그러한 사랑에 깊이 목말라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돈을 그렇게 긁어모은 것도, 세리 중에서 장이 되기 위해 애쓴 것도,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고 인정해주지 않을까?하는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사람이 부정하다고 멀리하던 나병환자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그들을 치유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녀를 모든 정죄함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 자기 수치감에 매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던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가셔서 그녀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킨 분이었습니다. 삭개오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이라면, 모두가 정죄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나를 방아주시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절한 나같은 죄인도, 예수님은 사랑해주시지 않을까? 사람들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는 나같은 죄인도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만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늘 수많은 무리에 의해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것 자체가 삭개오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키가 작아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도 그 분의 얼굴을 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길을 조금만 비켜달라고 요청해도, 그를 멸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간곡한 부탁은 묵살되고 외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너무 먼 일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갈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9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마침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그 방법만이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삭개오의 원함은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고 비웃고 욕하든 상관없이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무화가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어떤 장소입니까? 돌무화과나무는 삭개오의 수치가 모든 사람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의 작은 키, 사람들에게 거절 받는 그의 형편과 처지가 드러나는 곳, 수치가이 가장 절정에 달하는 곳입니다. 그 곳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고 사람들은 더 크게 비웃고 더 크게 정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로 삭개오는 기꺼이 올라갑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자신의 연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해도,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예수님을 뵙겠다는 그의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얼굴을 뵙는 자리는 화려하고 그럴듯한 자리가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수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 사람들의 비웃음과 자신의 수치가 가장 결정에 달하는 자리, 마음이 쪼개지고 깨어져 심령이 가난해진 그 자리가 예수님을 만났고, 만나고, 만날 장소일지 모릅니다. 삭개오가 올라간 돌무화과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지극히 사랑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야~'하고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눈빛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주셨던 예수님은, 이젠 그의 집에까지 오셔서 유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9장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돈은 많았지만, 세리장으로 출세는 했지만, 과연 삭개오가 이 때만큼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부름 앞에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에서 급히 내려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집으로 오시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사람들 앞에서도 낮이 섰겠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예수님이 우리집에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정죄 받고 비난받던 삭개오의 어깨를 확 펴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신 것만으로도 즐거움에 벅찬 삭개오였지만, 반면 삭개오를 욕하고 “죄인‘이라 정죄하며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웅성거립니다. "저 예수가 죄인의 집에 머물기 위해 들어갔다."고 이야기하며 이제 삭개오를 기꺼이 감싸 안으신 예수님까지 싸잡아 욕하고 비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삭개오와 같은 죄인으로 여깁니다. 삭개오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보단 그들은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신들을 제쳐두고 오히려 죄인인 삭개오를 품어 안으신 예수님을 보며 비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웅성거림 속에서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그대로 머물고 계십니다,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수근거려도, 모든 사람들이 오해해도, 모든 사람들이 비방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절해도, 심지어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담대히 그를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의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며, 끝까지 끝까지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는 사랑, 모든 두려움을 이겨낸 그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게 되면서 변화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변화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품 안에서, 지금까지 메말랐던 자신의 가슴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돈이 없어도 되는, 더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더 이상 돈을 움켜지고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돈을 많이 모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사랑한 이유는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움켜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장 안전함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혹시 돈이 많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성공해서 세리장이 되면 사람들이 우러러 볼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묶어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돈이 많고 적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높은 신분 때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는 죄인일지라도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삭개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죄해도,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을지라도,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에서 그의 변화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역시 삭개오가 받았던 그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 두려움을 내어 쫓는 진정한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외로움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부인당하시고, 돈 몇 푼에 팔리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침뱉음을 받으시고,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로 가시면서 우리를 향해 외치십니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난 어떤 고난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죽음일지라도 난 두렵지 않다. 네가 어떠하든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말입니다.
죄인이라 정죄함을 받고 비난을 받을지라도 삭개오를 결코 버리지 않고 그 집에 유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에게 주신 그 사랑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 그 온전한 사랑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 사랑을 ᅟᅡᆮ았으니 이제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받지 못할까봐, 인정받지 못할까봐, 수용 받지 못할까봐 우리는 그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은 오직 진정한 사랑뿐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그러했고,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이 그러했고, 키 작은 세리,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해 사랑으로 죽기까지 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화됩니다. 사람들의 정죄와 비방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모든 정죄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변화되었고, 죄책감과 수치심으로인해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변화를 경험했으며, 사람들의 비난과 거절로인해 외로움과 고독감으로 살아갔던 키 작은 세리 삭개오가 그를 용납하고 수용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삶을 붙잡게 했던 두려움의 족쇄에서 벗어나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사랑의 존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으나,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 사람들은 참된 자유와 안식가운데 기쁨과 축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온전하고 진정한 사랑과 은혜가 있는 예수님 안에 사는 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두려움을 떨쳐냈던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 수가성 우물가 여인처럼, 그리고 키 작은 세리 삭개오처럼 우리를 향해 쏟아 부어지는 주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쫓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치유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의 도입부에서 말씀드린 길채를 향한 장현의 대사는,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속삭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예수님, 그분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우리가 그 벅찬 사랑받는 자들로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