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 [오후 4:38] https://youtu.be/9pyRRIZd63M?si=jDgb_23XvAnL8a3B
제목 :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아는 것
본문 : 마태복음 25:14-31
누군가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에, 2명의 꼬마 아이들이 떠들면서 지하철 안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한 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승객들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창밖을 응시할 뿐 전혀 아이들을 제지하지도 않고 꾸지람을 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수군수군하기 시작했지만, 그런데도 아이의 아빠는 그저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한 승객이 아이 아빠에게 아이들을 제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때 서야 지하철 안으로 시선을 옮긴 아이 아빠는 연신 죄송하다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며칠 전 아이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오늘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인데,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서 미처 아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시끄럽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승객들은 어느 누구도 아이 아빠를 탓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귀로 들리는 것만 듣고는, 다른 이들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상대의 모습을 보고 너무 쉽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판단을 하기도 하고 정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귀로 들리는 것만 듣고 누군가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삶과 인생에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부분, 우리에게 감추어진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정말로 알고 있다면, 아니,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그들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더 알게 된다면, 그가 어떻게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경험했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고, 얼마나 애쓰며 몸부림치며 살아 왔는지 조금이라도 더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죄와 판단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앎은 부분적이고, 우리의 앎은 무지에 가까운 앎이면서도 우리는 전부를 다 아는 양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약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이 조금이라도 깊어지고 넓어진다면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나 태도 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질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에 대해 정말 무지했음을, 그리고 우리의 앎이 얼마나 짧고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다른 사람 뿐 아니라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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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영원한 생명” “영생”을 시간적 개념이나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앎은 하나님 즉 생명의 근원이신 참 하나님, 그 분을 아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분을 아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듯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잘 안다고, 올바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을 하지도 않고,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어쩌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진정한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고 상상하는 하나님은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내려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보다 더딤을 보고, 그들이 산 밑에서 어떤 일들이 행했습니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기로 합니다. 보이지 않으나 살아계시고 많은 표적을 보이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그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를 더 신뢰했던 것입니다. 지도자 모세도 보이지 않게 되자 마침내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금고리를 빼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분이 하나님임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거기에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 내 상상 속에서 그려진,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일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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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게 됩니다. 주인은 종들의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금 한 달란트의 현재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한 달란트는 보통은 34kg정도를 말하는데, 금 한 달란트라고 하면 금 34kg정도를 말합니다. 현재 금 1g이 6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것을 감안하며 약 20억에 해당하는 가치입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주인이 맡긴 소유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들과는 다른 일을 합니다.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이 맡긴 돈을 땅 속에 그대로 감추어 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자기 소유를 맡겼던 종들과 결산을 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각 자 그들이 남긴 달란트를 주인에게 고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들에게 동일한 말로 칭찬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25장 21절과 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말입니다. 두 종은 그들이 남긴 이윤의 양과 상관없이 주인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받습니다. 그 후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와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말하며 그 종이 가지고 있는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명하고 그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칭찬 받은 종들과 내어쫓김을 받은 종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결국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주는 주인의 모습과 같이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알맞은 재능과 은사와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신뢰함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소유를 맡기고 길을 떠났던 주인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셔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많은 재능과 은사를 통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큰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실상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그것은 우리의 수고나 애씀으로 얻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것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재능, 은사, 물질, 시간, 섬김 등 그 모든 것들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분의 은혜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충성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마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습으로 섬김과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으로 세워져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을 풍성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선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한 달란트를 가졌던 종의 모습을 관찰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그의 주인의 목적에 부합된 일을 하지 않은 가장 중요하고 우선된 이유는 바로 그가 주인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올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은 25장 24절~25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바로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즉 “거칠고 포악하며 무서운 사람, 고약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그는 주인을 아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은 아무 노력이나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종들을 부려먹고 노동력을 착치해서 이익을 갈취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대한 그의 왜곡된 생각, 잘못된 앎, 오해가 그 한 달란트 받은 종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실상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섯 달란트를 맡긴 종이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맡긴 종이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종들에게서 맡겼던 달란트를 돌려 받거나, 종들이 남긴 이윤을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맡긴 돈과 그들이 남긴 이윤을 모두 그들에게 주는 넉넉하고 인심 좋은 주인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맡기려는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들에게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주인이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아끼지 않았고, 종들이 작은 일에 충성한 것만 보아도 그것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주인이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이 예비한 즐거움에 함께 동참하여 그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하는 선한 주인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이러한 앎은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들로 하여금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충성되게 주인이 원하는 일, 주인이 뜻하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주인에 대한 왜곡된 지식, 잘못된 앎은 한 달란트를 맡은 종처럼, 주인이 자신에게 왜 그 달란트를 맡겼는지 의도도 모르고 주인의 마음도, 뜻도 모르는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동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 역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처럼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말한 욥의 고백처럼, 우리는 반 손으로, 알몸으로 나왔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 우리에게 주신 건강, 또는 질병, 우리에게 주신 물질, 소유, 재능, 은사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인 달란트를 맡긴 주인처럼 말입니다.
왜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하시면서, 우리를 부려먹고 일시키고 수고하게 하여서 이득을 보시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악덕 기업주이십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혹시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번 것 내가 수고한 것 내가 애쓴 것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용하시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는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을까요? 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재능과 은사와 물질을 아까워하고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앎, 지식,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12절을 함께 읽게 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까요? 돈이 많은 사람일까요?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말씀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믿는 자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2절 사이에 접속사 “그러므로”가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믿기에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풍성히 대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접한 그 사람이 우리에게 갚지 않아도, 우리 아버지가 좋으 것으로 주시는 풍성한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이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믿음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25절부터 3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분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야지를 수천번 되뇌인다고 염려가 근심이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서 놓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할까요?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르짖는 자에게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행위를 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떤 사람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은 그 분을 사랑하는 자,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서와 같은 서신입니다. 그의 영정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처럼 기가 막힌 삶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일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지만 그의 최후는 참으로 초라하고 외로웠습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살아간 결과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받는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예수를 믿는 결과가, 복음을 전하며 온 삶을 바친 결과가 그것밖에 안되는가? 질타하며 비웃고 조롱하지만, 그는 그가 받은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복음 전파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울에게 의탁하 것, 바울에게 맡긴 그 사명을 하나님이 친히 능히 지키시고 이루실 분임을 바울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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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선행을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올바로 아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번에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애굽 바로의 군대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4장 4절을 보면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14장 18절을 보면,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많은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칭찬과 축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중 많은 분들이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처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 왜곡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만 일을 시키고 나만 부려먹고, 내 것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고약하고 포학한 분으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계신 이기적인 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금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결산할 때에 그 돈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에게 꾸중을 듣고, 받았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받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결국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종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즉 주인에 대한 무지, 잘못된 앎에서 기인한 결과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바로 주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그 주인에 대한 지식은 올바른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에서 종들의 행동이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함 역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의 행동을 결정짓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어디에서 판가름 나는가 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앓,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써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많은 기적과 역사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장 1-3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합니다. 그 분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야 우리는 그 분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찢으시고 치셨으나 그것이 본심이 아니라 우리를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고 온전한 회복을 주시려는 본심을 가진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고 다시 일으기실 하나님, 항상 신실하신 하나님, 늦은 비와 같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닌, 유일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른 앎의 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길 소원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드려지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과 사명을 수고와 부담으로 내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올바른 앎에서 비롯한 기쁨과 즐거움의 섬김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 하나님이 예비하신 즐거움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리게 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올바른 앎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실수하고 정죄하고 잘못을 하곤 하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스스로 속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에 대한 앎도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면, 제대로 안다면, 올바로 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변화될까요?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분이지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삶을 살게 될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 알아도 우리는 감히 이 세상에서도 충분히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는 복이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서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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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고린도전서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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