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w0DM_r8egg?si=mnoTbq3oQ96esTCv
전래동화 중에 “은혜 갚은 까치”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깊은 산골을 지나가다가 까치 떼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선비가 가서 살펴보니 황구렁이가 까치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까치집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선비는 구렁이를 죽여 까치 새끼를 구해 주게 됩니다. 그날 밤 선비가 불이 밝혀진 기와집을 보고 하룻밤 묵으려고 가서 청하니 예쁜 처자가 진수성찬을 차려 주며 선비를 맞이합니다. 선비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자 예쁜 처자가 먹구렁이로 둔갑을 하면서 ”네가 내 남편을 죽였다.”며 선비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까치 떼들이 날아와서 종을 때리자 먹구렁이가 사라졌고, 선비는 생명을 잃지 않고 과거를 보러 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이 아는 동화이야기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갚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요즘 세상은 오히려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가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배신하고 베풀어 준 덕을 잊는 세상. 아니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은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 내 봇짐 내라 한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옛날에 한 나그네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선비가 나그네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선비의 멱살을 잡고 대뜸 자기 보따리를 달라고 하면서 선비를 도둑으로 몰아갑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남에게 도움을 받아도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쉬울 때는 도움을 청하다가도,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하거나, 도리어 은혜를 베푼 사람을 모욕하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평생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은혜 갚은 까치”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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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한 마을로 들어가셨을 때,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들의 몸이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곧바로 제사장을 향해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는 도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 한 명,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멸시함을 받았던 사마리아인 한 명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나병환자들은 지금도 사회적으로 격리를 당하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 때로는 소외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의 나병환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초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병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무서운 병으로 인식되었고,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추방당해야 했고, 가정에서도 떠나야 했습니다.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없고, 삶의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립니다. 어찌 보면, 나병환자들은 살아있으나 살아있다고 말하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몸은 상처와 고름과 피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 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도 없으며 종교적인 활동이든 사회의 활동이든 참여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접촉하게 되면, 그 접촉한 사람들 역시 부정하게 되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드러내놓고 싶지 않는, 감추고 숨기고 싶은 자신의 병, 자기 수치를 늘 상 외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따듯하게 받아주고 안아주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소외되고 버려진 것 같은 외로운 삶, 소외된 삶,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나병환자들 이었습니다.
1) 문제와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간청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분의 옷을 붙잡고 제발 고쳐달라고 매달려 애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들이었고, 나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으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가까이 나갈 수도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만질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그 분께 매달리고 애원하는 그런 열심 때문에 나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스스로 어떤 열심도, 어떤 노력도 할 수 없는 부정한 자들이기에, 그저 예수님의 긍휼만이, 자신들을 향한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만이 그들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임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그 마을에 나병환자는 얼마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열 명이라는 숫자도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이 들어가신 마을에 원래부터 격리되어 거하던 사람들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다른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고, 그 분의 긍휼을 바라고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나올 때에는 엄청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한 그 치유를 받은 사람들 중에 나병환자도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매여 “나 같이 부정하고 더러운 자가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이나 있을까?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이 병을 진짜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을까? 세상 누구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나를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주실까?”라는 수많은 질문들과 의문들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긍휼함, 그분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구합니다. 목숨을 건 믿음, 목숨을 건 용기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제 각각 그들만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고통 없는 인생이 없고,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문제와 고통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문제와 고통 속에서도 절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문제와 고통가운데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절망과 낙심뿐임을 깨달아, 오직 소망되시는 예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바라보며 간구의 자리, 부르짖음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믿음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가 해결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는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그 분의 긍휼이 우리를 치유하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소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문제 속에서 예수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게 되고 그 분의 뜻을, 그 분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며 기도의 자리로, 부르짖음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연약하고 초라하고 열 명의 나병환자를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기적적으로 그들이 모두 나음을 얻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 자리에게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그들이 얼마나 감격하며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춤을 추며 좋아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그들을 치유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 하셨을 뿐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은 또한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들의 몸이 곧바로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없었고, 어떤 치유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곧바로 제사장을 향해 길을 가게 됩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의 판결과 치료에 대한 판결은 제사장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부터 제사장은 나병환자가 나았는지 직접 확인하여 그가 다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육신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 나병이 치유되지 않은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동시에 그들의 나병이 이미 나았음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이미 그들의 나병이 나은 것처럼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았음을 확인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아직 몸이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가고 있습니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는데 깨끗함을 확인 받기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누가복음 7장 1-10절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칭찬한 백부장의 믿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듣고 그 종을 고쳐주기 위해 백부장의 집으로 함께 가시려고 할 때, 그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도, 또한 내거 주께로 나아가기고 나는 감당하지 못하오니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은 낫게 하소서.”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은 눈으로 확인해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잇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그들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의 믿음 역시 이런 믿음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몸에 새살이 돋거나 상처가 치유되는 회복의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이미 깨끗이 나은 것임을 믿고 제사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이들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전히 상황은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문제는 산적해 있고, 회복될 기미조차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성취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지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성취됨을 우리의 삶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짐을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들의 몸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믿음을 갖고 여전히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임을, 반드시 이루어짐을 삶에서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실재가 됨을 누리고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믿음의 한 사람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단지 그들을 치유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그들을 고치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병이라는 질병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치유 받고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이유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고쳐주신 목적은 그들을 치료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들로 하여금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셔서 그 분을 더 신실하게 믿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이유에서 그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 기적과 같은 사건을 통해 그들이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고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고 그 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 분께 감사하고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그렇습니다. 과연, 자신의 몸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보고 안 사람은 이 사람 한 명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두 깨끗함을 받고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했던 나병에서 모두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문제를 해결 받고 그들을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열 명 중 아홉 명은 문제를 해결 받는 것에서 끝났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른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으로부터 치유됐음을 확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지금까지 옭아맸던 나병에서 벗어나게 되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나병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친지들에게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몸도 바빠졌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예수님으로부터 더 멀리 멀리 떠나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많은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누구는 질병에서 나음을 얻습니다. 누구는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누구는 자녀들이 성공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옭아맸던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후, 우리를 괴롭고 무겁게 하던 삶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난 후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로인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분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바뀌니 그것이야말로 바라던 바이기에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내 삶에 취해, 주님을 더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수고를 멈춰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데 물론 관심이 있으십니다. 왜냐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받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수고가 멈춰지든 그렇지 않든지, 우리의 고통이 제거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 알고 가까이 하는 그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분을 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 받는데서 멈춰 예수님을 멀리하는 삶이 아니라, 어떤 문제와 상황 앞에서든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깨닫고, 그 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 분께 감사와 영광을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영광을 돌린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을 보였지만,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치유되어 더 이상 예수님이 도움이 필요 없을 때는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기적이 예수님께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디딤돌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멀리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 받는 은혜와 기적이 삶의 목적이 될 때, 우리 역시 그들처럼 믿음의 성장을 멈출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누가복음 17장 16절~19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멀고 험한 길이었지만, 이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 열 명의 나병환자들 모두가 치유 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돌아와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아홉은 그 은혜를 누리는 데에만 바빴지, 그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아홉은 그 기적을 누리고 자랑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멀리 멀리 떠나갔지만, 이 한 사람은 그 기적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다 말은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 이 역시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환경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믿음 역시 귀한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의 모습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기적이 무엇이든,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은혜가 무엇이든, 그 모든 허락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더 깊이 깨달아 가는 믿음, 그래서 우리가 처한 문제가 부딪힌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무엇이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 분께 감사로 영광을 돌리는 믿음, 그러한 믿음으로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기적과 은혜가 우리의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기적과 은혜를 누리게 되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기지 못하고 그 분을 멀리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여,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감사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요동함 없이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주님께 나아오지 않고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긍휼의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간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르짖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걸어가는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 믿음에서 멈추지 말고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기적과 일상의 은혜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더 갚은 깨달음을 얻고, 그 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진정한 믿음으로 성장해 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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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1월 14일, 1년간의 참치 조업을 마치고 말라카해협에서 부산항으로 돌아가던 참치 원양어선 '광명 87호'의 전제용 선장은, 오후 5시경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SOS를 외치는 소형 난파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난파선에는 베트남 난민들 일명 보트피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9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베트남 사람들이 소형 보트를 타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난민들이 많아지자 당시 인접 국가들은 난민들에 대한 입국거부와 강제송환으로 베트남 보트피플은 국제문제로 비화되기도 했었습니다.
난파선을 본 후, 전제용 선장은 그 상황을 본사에 타전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사는 “관여하지 말고 그냥 지나치라.”는 지침을 내리게 됩니다. 그는 관여하지 말고 그냥 지나치라는 본사 지침과 죽을 위기에 처한 난민들을 살려야 한다는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뱃머리를 돌려 그들을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함께 있던 선원들이 우려했지만 전제용 선장은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며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난파선, 그 작은 보트 안에는 베트남인 96명이 겹겹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들은 식량도, 물도 없이 굶은 지 벌써 사흘째였습니다. 그들을 구출할 당시 성난 풍랑에 금세라도 침몰할 것 같았지만 그들 모두 안전하게 구출됩니다. 광명 87호가 그 곳을 지나가기 전에 이미 25척의 배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보트피플을 외면하고 지나갔지만, 전제용 선장은 그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까지의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보트피플을 구조한 후 본사에 연락을 하자, 난민을 싣고 부산에 오지 말고, 그들을 무인도에 하선하라는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이에 전제용 선장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뗏목을 만들어 태워 보내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러나 전제용 선장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들어가 그가 책임져야 할 일들, 감당해야 할 일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는 본사의 지시에 불응하고 베트남 난민들과 부산항으로 들어가는 항해를 함께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전제용 선장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는 선원들의 침실을 내주었고, 노인들과 환자들은 선장실에서 돌봄을 받도록 배려합니다. 선원 25명의 식량과 생수를 나누었고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 잡은 참치가 배에 가득하다며 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도 했습니다. 영어교사 출신으로서 당시 리더였던 피터 누엔이 베트남에 두고 온 가족 생각으로 슬퍼할 때마다, 전제용 선장은 그를 극진히 위로해주면서 자신의 사진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11월 29일 광명 87호는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전제용 선장은 즉시 해고 통지를 받게 되었고, 공산국가의 사람을 들여왔다는 이유로 보안 당국에 불려가 취조까지 받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 후 그는 여러 선박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받아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전제용 선장은 여러 고초를 겪고 그의 생업이었던 항해를 그만두고 결국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와 멍게 양식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죽음의 위험에 처한 난민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유로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반면, 임산부를 포함하여 96명이었던 베트남 난민들은, 태어난 아이 1명과 함께 모두 97명이 되었고, 이들은 부산항에 들어온 후 1년 6개월 동안 임시 난민소에서 지내게 됩니다. 당시에는 한국에 난민법, 제대로 된 난민과 관련된 협약이나 규약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에 관한 처분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난민소에 머물렀음에도, 그들은 부산항에 들어온 후 한 번도 전제용 선장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후 그들은 미국과 유럽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고, 보트피플의 대표였던 피터 누엔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고, 미국에서 자기 가족과 재회하며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피터 누엔은 단 한 순간도 전제용 선장을 잊지 못했습니다. 피터 누엔은 정말 간절히 전제용 선장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전제용 선장을 찾기 위해 한국 상점도 가보고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17년간의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와 연락이 닿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동안 전제용 선장과 편지로 연락을 취하게 됩니다.
전제용 선장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자신들의 생명을 건져주고 나서 전제용 선장이 겪었던 고생담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용 선장은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트피플을 구조할 당시 제 경력과 미래가 희생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로 선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게 될 불이익보다 베트남 난민들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96명의 생명을 맞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8월 5일 LA공항에서 피터 누엔이 전제용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터누엔이 전제용 선장을 미국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19년 만의 극적인 상봉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19년, 19년 만이네요." 피터 누엔은 19년 동안 단 한 순간도 그를 잊을 수 없었다며 감격했습니다.
피터 누엔과 전제용 선장이 재회의 순간을 주요 언론, 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다루었고, 전제용 선장을 환영 행사에는 1000여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과 정치인들, 지역사회 관계자들이 붐비는 등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제용 선장은 난민 구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도자에게 UN이 주는 인권상인 '유엔난센상' 후보에 추천되기도 합니다. 이후 전제용 선장의 이야기는 한국, 베트남 할 것 없이 수많은 곳에서 '난민 구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졌고, 한국-베트남 우호의 길을 여는 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전 전제용 선장이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했다는 소문이 2005년 베트남 본토에까지 전해지자, 베트남 본토인들의 감동은 엄청났습니다. 2019년 11월 18일 전제용 선장은 자신의 고향, 통영에서 별세하였으나 그가 살린 목숨들은 전 세계에서 수백, 수천의 자손으로 퍼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피터 누엔은 자신의 삶을 최저로 생활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정신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전 제용 선장이 자신의 경력, 생명, 미래의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음을 기억하며, 그 분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자원봉사의 삶을 통해 전제용 선장님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합니다. 또한 전제용 선장은 그런 피터의 삶을 본받고 싶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다른 이들의 생명을 더 가치 있게 여겼던 전제용 선장과 25년이 지나도록 은혜를 잊지 않고, 그 받은 은혜를 그대로 삶 속에서 베풀고 섬기며 살아내는 피터누엔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그 진실 된 마음이 통해 특별한 인연이 된 것입니다.
피터누엔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전제용 선장이 나에게 했던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도운 누군가에게 은혜를 같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2004년 8월 5일에 미국으로 왔던 전제용 선장이 모든 일정을 마티고 귀국하기 전날 밤인 8월 20일, 전제용 선장은 숙소에서 피터누엔과 마주앉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터누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제 내가 고백할 차례”라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는 전제용 선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 96명늬 난민 중 많은 사람이 당신이 오기를 고대하니, 꼭 미국에 오라고 했는데, 사실 전 선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중 10여명과 연락이 닿았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너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전 선장은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한다고 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피터 당신 한 사람만으로도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모두가 그것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그에 감사해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이런 사람들의 믿음에 기쁨으로 반응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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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7:11-19
누가복음 17:11-19)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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