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3x0CYxClnA?si=WrKZsk4Jwvt1ykzK
https://youtu.be/5NVAEH6X0mM?si=c7NWG1oM1x61pySi
오늘 함께 본 영상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상은 눈을 감은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손을 만지면서 그 사람의 직업을 추측해보는 내용의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손은 단순히 뼈와 살로 이루어진 신체기관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생애의 보따리와 같기에, 아마도 손을 만지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대략 추측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이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만들어진 듯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만진 손은 다름 아닌 그들의 엄마, 엄마의 손이었습니다. 늘 자녀였던 그들과 함께 있었고, 항상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었을 손, 그들을 키우고 돌보기 위해 많은 고생과 힘든 수고를 담고 있던 손이었지만, 정작 한 번도 그렇게 자세히 만져보지 못했던 손, 그렇게 한 번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손, 정작 우리 엄마의 손이 이랬어?라고 의문을 자아내는 손, 그것이 바로 그들 엄마의 손이었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들은 상대의 손을 만지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상상하고 생각하며 느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손이 수만 시간 누군가를 키우고 돌보기 위해 물을 만졌고, 그 손이 누군가를 위해 수많은 무거운 짐을 들어 올렸고, 거칠고 힘든 일들을 감당한 손이었음을, 비로소 그 손을 잡아보고 만지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었을 때, 그 손은 바로 엄마의 손이었고, 그 엄마의 손이 그렇게 거칠고 투박하고 굳은살이 베길 정도의 딱딱한 손이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을 위한 헌신과 희생 때문이었음을 그들은 비로소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엄마의 손을 이렇게 세심하고 꼼꼼히 만져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 그랬다면 엄마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엄마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은 뭔가 달라지고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누구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우리 또는 우리 부모님들 모두에게도 꽃처럼 고왔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여기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은 부드럽고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 한 방울 묻혀보지 않고, 무거운 것 하나 들어보지 않았던, 힘들고 궂은 일들은 다 남들의 몫으로 여겨졌던 시절을 보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괴로움 많고 거친 세상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내다 보니,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를 키우고 돌보다보니 어느새 우리의 손은 거칠어지고 투박하게 변해져 갔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의 손을 만지면,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충 그 분의 삶이 어떠했는지 아주 조금은 추측하거나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손에는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만들 만들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손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지만, 통나무처럼 투박하고 거친 손을 가지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한 번 자신의 손을 바라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이 손으로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왔고 지금도 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수고한 신체의 기관인지도 모릅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손은 참으로 분주히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손에는 우리의 인생과 삶의 모든 굴곡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손은 어떠할까요? 하나님의 아버지의 손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손을 상상하고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만약에 그 분의 손을 직접 볼 수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가 넘어질까 노심초사 하시는 손, 또 넘어지면 우리를 일으키시느라 분주한 손, 우리가 상처 입고 아파하면 쓰다듬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여전히 일하시는 손, 바로 그 손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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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손”이라는 단어가 4번(10절 1번, 16절 3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는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은 닫은 천사들의 손이고, 나머지 손은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들의 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이야기하면서, “손”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손을 잡아끌어 인도하는 천사들의 손이 함의적으로 내포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사람들의 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손은 누구의 손과 닮아 있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 지금도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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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고통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웠던 땅, 죄악이 관영했던 소돔 땅을 찾아가는 두 천사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천사들은 곧 멸망할 소돔 땅에 있는 롯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려지는 소돔은 참으로 악한 땅으로 그려지지만, 롯이 소돔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눈에 보인 소돔은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땅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갈대아우르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그 땅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고 양과 소와 같은 가축이 많아져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 때 롯은 요단을 바라보며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한 땅,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아 보이는 소돔을 선택하여 그 땅에 이르러 살게 됩니다. 실로 그 땅은 물이 넉넉한 땅이었고, 가축을 기르기에 풍요롭고 좋은 땅이었지만, 실상 여호와 앞에서는 악하며 큰 죄인들이 거주하는 땅, 죄악이 관영한 땅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롯이 소돔 땅에 거주하면서 그 곳 사람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였고 심령이 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롯은 풍요를 따라 스스로 소돔 땅을 선택해 들어갔지만, 그 땅에서의 삶은 늘 행복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상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롯과 같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때로 롯처럼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성공과 풍요와 명예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기쁨은커녕 고통을 주고 또 때로는 심령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롯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세상이 쫓는 것을 함께 쫓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롯은 소돔 땅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갔을지는 모르지만, 성적으로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한 그 땅에서 심령의 상함과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고 베드로후서 2장 6-8절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롯은 소돔 땅에서 심령이 상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땅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그 땅이 부요하고 풍요로움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풍요와 부요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 땅에 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롯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풍요를 따라, 세상의 가치를 쫓아 살아가면서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고 상한 심령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그러면서도 세상을 쫓아 살아가는 삶을 결코 버리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살아가는 우리, 온전히 하나님을 붙잡는 것보다 세상의 물질과 풍요로움을 붙잡는 것이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롯의 모습에서 보이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고, 이런 미지근한 믿음의 삶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 어떻게 일하고 계실까요?
1)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창19:1-3)
“(19: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19: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19: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하나님은 소돔 땅에서 부요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롯을 건지시기 위해 두 천사를 보내십니다. 사실 롯은 자신을 상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소돔 땅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땅의 죄로 인해 심령이 상할 때 그는 그 곳을 빠져나와야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물질의 풍요로움과 부요함이 주는 유익을 포기하지 못하고, 죄악이 관영한 소돔 땅에 머물러 거주하며 그 곳을 빠져 나오지 못하자, 하나님은 친히 그 곳으로 들어가셔서 그를 빼 내오시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머물러야 할 자리 역시 세상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으면 안 되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분주히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하는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 주인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한 분이면 만족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모든 공급의 근원이시라고 고백하지만, 실상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는 참으로 많은 롯의 모습이 발견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늘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그들을 영접하고, 롯의 간청으로 두 천사는 마침내 롯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식탁의 교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롯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사람이었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들을 영접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그들에게 식탁의 교제를 베푸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붙잡는 귀한 통로가 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우리도 늘 머뭇거리며 주저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그 분을 알아볼 수 있는 열려진 영적인 눈과 그 분을 영접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지길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손은 세상의 죄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창 19:4-11)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19: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19: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19: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19: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9: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9: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가 식탁의 교제를 하고 누우려 할 때에, 소돔 성 사람들,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롯의 집에 온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 사람들은 급기야 폭도로 변합니다. 롯은 두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문밖의 무리에게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아직 남자를 접한 적이 없는 자신의 두 딸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며 타협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롯의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소돔 사람들의 악행을 자극해 롯은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눈을 어둡게 하고, 그들은 문을 찾느라 헤매게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죄악으로 물들이고, 고통으로 상처 입히고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우리 역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다보면, 세상의 방식을 따라,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도 많습니다. 롯은 비록 자신의 집에 찾아온 천사들을 보호하려고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타협했지만, 이 역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 물들어 살다보면 우리도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도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 백성으로 가져야 할 모든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스스로를 속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롯은 하나님의 사자인 두 천사를 지키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이 주는 고통과 상처로 우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세상의 방식에 타협하며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롯은 하나님의 사지들을 지키는 일에 실패했지만, 오히려 두 천사들은 롯을 밀치며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 그 소돔의 사람들로부터 롯이 상하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타협해서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세상의 죄악으로인해 파괴되지 않도록 우리를 감추시고 끌어 안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우리를 세상의 악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데 분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받고 쓰러지지 않도록, 세상에서 넘어지고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손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살며,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에 물들어 세상과 함께 멸망으로 나아가는 롯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은 멈추지 않으셨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의 손은 멸망하는 세상에서 주저하고 지체하는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십니다. (창 19:12-17)
(19: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소돔 사람들의 죄로부터 롯이 상처받지 않고 고통받지 않도록 보호하신 하나님의 사자들은 롯에게 ‘소돔을 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보냈으니 롯에게 속한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그에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일어나 이 곳을 떠나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소돔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롯이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 살아갈 때, 그의 사위들조차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며 비웃었듯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의 말들을 우습게 여기고 조롱할 것입니다. 롯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롯은 동이 틀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또 천사가 그를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들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한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롯은 서둘러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지체합니다. 그렇게 롯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소돔 땅을 떠날 것을 지체하자 하나님의 사자들은 주저하는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게 됩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두 딸들을 심판에서 건져 구원하려는 열심은 오히려 그들보다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여전히 멸망하는 소돔 땅에서 떠나기를 주저하는 그들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려는 열심 또한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롯은 곧 하나님께서 소돔 땅을 멸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 심판과 멸망과 죽음 앞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나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고 건지고 살리려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건짐으로 받고 생명을 보존 받았습니다. 창세기 19장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서 “멸하다” 또는 “멸망하다”는 단어가 4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지금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방식으로 살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으로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그곳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여전히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지체하는 우리들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멸망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손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손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 손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손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생명을 보존 받도록 지키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를 확증하신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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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년, 알베르트 뒤러가 종이 위에 브러쉬와 잉크를 이용해 그린 “기도하는 손”은 현재 독일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독일미술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위대한 작품 속에 있는 기도하는 손은 곱지 않고 매우 거친 손입니다. 이 그림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알베르트 뒤러와 프란츠 나이스타인은 한 마을에서 같이 자라며 그림을 그렸던 단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해서 제대로 된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프란츠가 뒤러에게 제안을 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네 학비와 생활비를 보낼게. 네가 먼저 미술학교에 가서 훗날 화가가 되어 돈을 벌면 그 때 내 미술 공부를 네가 도와다오.”
1508년 친구의 도움으로 공부를 마치고, 화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 온 뒤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친구 프란츠의 집이었습니다. 친구는 자기 방 탁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나지막한 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이미 험한 노동으로 손이 굳고 손마디가 굵어져서 섬세한 붓질을 해야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대신에 내 친구 뒤러가 뛰어난 화가가 되었으니, 저는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프란츠의 기도를 듣고 있던 뒤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종이를 꺼내 친구 프란츠의 거칠고 투박해진 손을 그리게 되었는데, 바로 그 그림이 위대한 작품인 “기도하는 손”입니다. 프란츠는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꿈을 버리면서 까지도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랑의 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알베르트 뒤러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요.”라는 말을 말이죠.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바로 이렇게 거칠고 투박한 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손,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간구하시는 손 말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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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1-16)
(19: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19: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19: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19: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19: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19: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19: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9: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9: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19: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이사야 59:1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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