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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


https://youtu.be/LI7Dtv7VnvY?si=eK8J6l0pEAH6M7rZ





『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

■ 본문 : 누가복음 18:9-14

(눅 18:9~14) “(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롬 5:20~2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요일1: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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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죄인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실상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니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과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지만 실상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죄인”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고,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을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 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입니다. 성경상의 원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감’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죄”는 기준, 과녁에서 벗어나고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녁,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내가 기준이었습니다. 나에게 잘하면 선이고, 나에게 유익이 되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에게 못하면 악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하면 좋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에게 못하면 그 순간부터 갑자기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준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기준으로 살 때는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것이 옳은 것이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죄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어보니, 그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기준일 때는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보니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지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란 기준이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 아닌 과녁, 기준을 맞추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었던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고, 내가 기준이었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바리새인”과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세리”에 대한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 알아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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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참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결한 삶을 살았으며, 공적인 기도, 금식, 십일조 등 종교적인 의식을 엄격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반면 세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해 로마제국에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부정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많은 이득을 착복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챙겼기에 돈은 많았지만, 로마제국의 앞잡이 또는 민족의 배신자로 취급을 받으면서,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는 낮은 지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바리새인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세리,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부류에 들어가길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모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모두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그 이유가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대화하며 교제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은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하는 모습과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는 꼿꼿하게 서서 기도합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인양 세리 옆에는 가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먼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하나님께 각인시켜드립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토색(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돈이나 물품 따위를 강요하며 억지로 달라고 하는 늑탈, 강탈과 같은 일),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즉 그런 죄를 짓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세리와도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죄를 짓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즉 죄인이 아니라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한껏 자랑합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의롭게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아셔야 한다고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바리새인은 정말 대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보면, 그에겐 하나님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고 있고, 혼자서도 의롭고 거룩할 수 있으니 하나님쯤은 자신의 삶에 개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혼자서도 잘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기도 속에는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하나님께 자랑하듯이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지 말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더 의롭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함도 연약함도 인정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 없고, 또한 자기 죄도 인정하지 않기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도 필요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있게 만드는 통로가 아니라 자기 자랑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듯 보입니다. 그의 금식, 그의 십일조 그의 모든 종교행위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믿음의 반응이라기보다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기중심성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 하나님조차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움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기 위해 애쓰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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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누가복음 18장 13절에는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과 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세리는 기도할 때 멀리 서서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낄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저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애통함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그의 기도의 모습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부끄러움과 겸손함이 절절히 드러나 있고, 그의 기도의 내용 역시 자신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라면 자신은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 절실함이 묻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소망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입니다. 자기의가 아닌 완전히 하나님에게 의존한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이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이루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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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에 누가 더 의로워 보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세리입니까? 바리새인이 더 잘 살고 있고,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보다 세리를 더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정한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죄에서 구원할 수도 없고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 아닌 이미 죽은 죄인이기에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자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행하는 그 어떤 종교의식이나 종교행위들로 의로워지거나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의롭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스스로 자기 의로움에 취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애통함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하고 예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 말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얼마나 죄를 졌는지 깨닫게 되었고,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이 깊을수록,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럴 힘도 능력도 없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예배하는 삶으로 이끌어가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가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 모든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반응하는 자로 우리를 만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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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하디 선교사( 하리영, 1865-1949)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2년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토론토 의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미국 부흥 설교가  무디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의대 1학년 때 선배 게일이 “조선 선교 간증”을 할 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호소를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1890년 토론토 의대생 기독 청년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한국으로 파송되어 서울, 부산, 원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로 소속을 옮겨 개성, 서울, 원산에서 선교 사역에 힘쓰게 됩니다. 개성에서 남성병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돌보고, 다시 원산으로 파송을 받아 근교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후 1901년부터는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개척선교사로 3년간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 선교한지 13년이 지났고, 원산에 부임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이렇다할만한 선교의 결실도 없었고, 성과도 없었습니다. 초교파 기도모임을 하는 등 열정적으로 조선 선교에 힘을 썼지만, 결과는 사역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좌절감에 빠질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미신을 숭배한 조선 사람들이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디가 어렵게 세례를 주면 출교하거나 이사해버렸고, 교인들의 집에 불시에 방문해 보면 술상을 놓고 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습니다. 하디는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애를 써도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대단히 실망을 하게 됩니다. 조선인이 미개한 민족이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비참한 것이라며 교인들을 탓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무력감에 스스로를 자책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연합 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때 자신의 선교가 실패하게 된 원인이 조선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그는 선교를 하면서 자기가 말씀을 전하면 조선 교인들이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의 열매를 맺어주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정작 하디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지도 못했고, 회개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비로소 그 시간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조선인을 미개한 민족으로 생각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의사로서의 신분적인 거만함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도 하지 않고 얼마나 성령 충만 없는 사역을 하였는지를 회개하였고, 이를 본 많은 선교사들도 함께 그들의 죄를 자복하게 됩니다.

그 후 하디 선교사는 곧이어 맞이한 주일예배 때 조선인 교인들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오만과 굳은 마음, 불신을 자백하게 되고, 선교비를 유용한 일까지 털어놓게 됩니다. 그리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회개를 하게 되었고, 회개는 들불처럼 퍼져나가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발화점이며, 길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시작점이 됩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생각해도 하디 선교사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인의사로서 충분히 자기 나라에서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선에 선교하러 온 대단한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도 열심히 했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병원을 세워 의료사역도 하고, 여러 교회도 세우고 개척해서 복음도 엄청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진정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자책하고, 조선 교인들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하고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미개한 조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스스로를 특별하고 의롭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지만 실상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시고, 그를 통해 한국 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을 때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조선인을 미개한 민족으로 생각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여기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진정한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디는 그 후로도 계속 조선에서 선교에 힘썼고, 어린 자식 둘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으며 이 땅에서 45년을 섬기게 됩니다. 이제 그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교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다시 젊었으면 즐거이 조선으로 나오겟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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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 성공과 복을 달라고 구하기 전에,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말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실 예수님을 더 간절히 찾고 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그 은혜를 깨닫게 되면 그 은혜에 기쁨과 감사로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 때가 주님이 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적인 부흥을 맞이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고, 우리 안에 소망이 없음을 알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지한 자인지를 깨달을 때가 아닙니까? 그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까?
그 때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때보다 크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고 드려도 아깝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여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으로 일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진정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우리가 금식하고 구제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우리가 말씀과 영성 훈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그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내 힘과 내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금식, 십일조, 구제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으로 살아가시는 가난한 분이, 능력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미 충분히 전능하시고 지존하긴 분입니다. 또한 우리가 의롭게 살아도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을 더 의롭게 만들어드리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구제하는 것은 우리가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신앙의 삶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니 이미 죽은 죄인인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그분과 교제하고 이야기 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분을 더 간절히 사모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며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고 왕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그 분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며 구제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삶의 근원이고 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어떤 종교적인 행위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자주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할 일들,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자꾸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내 자신을 비교하면서 내가 얼마나 특별하고 잘난 사람인지를,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리고 헌신했는지 자꾸 주장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랑이고 나를 높이는 도구로 전락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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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높이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주님이 높여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철저하게 죄인임을 깨닫는 은혜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길선주 장로 고백)
하디 선교사의 회개가 원산부흥운동의 포문을 열었다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이 길선주 장로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2주간 신년특별집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 집회에는 약 15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는데에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고, 어떤 선교사들은 이제 평상시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가 일어서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임종을 앞둔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 난 그 부인 재산을 관리하던 중 욕심에 겨워 부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집회이 분위기를 억눌렀던 힘이 사라지는 것 같더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교만과 편견을 회개했고, 교인들은 선교사에 대한 미움과 질시를 뉘우쳤고, 노름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성경 말씀과 달리 첩을 둘이나 두는 등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바닥에 떼굴떼굴 구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진정한 회개는 또 다른 회개를 낳았고, 변화된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이들은 곧 자신의 죄를 배상하는 행동을 했고, 이런 행동은 삶이 변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인 절도 간음 횡령 등 일반적인 죄 고백도 있었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까지 죄의식을 느끼고 고백하며 회개했고 변화된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주일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이 진정한 회개를 하면서 나타났고, 길선주장로의 회개는 1907년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