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WTtGfrMAlI?si=q9eUJ3h0xOwxp7-P
예수님이 선택한 세상과 다른 길
본문 : 마 26:36-56/ 막 14:43-47/ 눅 22:48-51/ 요 18:10-12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한 탐욕이 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쟁이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군대와 무기입니다. 군대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막강한 무기를 가지면 가질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물론 돌팔매와 돌맹이 5개를 가진 다윗과 창과 방패와 갑옷을 입고 나왔던 골리앗과의 전투는 다르기 했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군인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모집해 강대한 군대를 만들었고, 또한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무기였다면, 청동 시대의 청동 무기를 거쳐 철기 시대에는 강력한 철제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심각한 위력을 초래하는 핵무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무기로 인해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고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그러한 고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오직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이든 패배하는 쪽이든 모두가 상처를 입고, 모두가 트라우마와 외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단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나 나라안팎,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의 기준으로 인해,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생각으로 인해, 서로 다른 종교로 인해,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은 전쟁터가 되었고, 우리는 매일 마다 분열과 다툼과 싸움과 전쟁을 목도하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도 둘로 쪼개지고 나뉘어져 첨예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분단을 넘어 국내적으로 정치적 이념부터 세대·계층 갈등까지 그야말로 대립과 반목이 폭증하는 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화합하는 일에 손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돈 속에서, 무엇이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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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올해 목회데이터연구소(목데연·지용근 대표)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 '한국교회를 관통할 가장 핵심 키워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양극화'가 꼽혔습니다. 또한 1월 공개한 '한국사회 갈등 수준과 인식'이라는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인 58%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 이념(정치) 갈등과 연관돼 있다"고 대답함으로써 교회가 사회통합 기능을 하기보다 갈등을 되레 초래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정치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향해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폭언과 폭력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혼란과 분열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무기를 들고 전쟁을 치러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셨고 반응했는가? 를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봄으로 삶의 적용점을 찾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도전과 은혜를 받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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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시는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이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일임을 아셨기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아셨지만,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는 길, 아니 죽어야 하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고민하여 죽을 정도로 힘들다고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원함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이루기 위한 원함 사이에서 예수님은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드려진 기도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을 입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그러나 고민하여 죽을 정도로 힘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제자는 하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홀로 기도하시는 동안에 모두 육신이 피곤하여 지쳐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고 있었던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말씀하신 후,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피곤해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다시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게 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음의 자리까지도 기꺼이 순종함으로 나아가겠다는 담대한 순종이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바로 그 때였습니다. 예수님과 3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제자 가룟 유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의 자리에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늘 들었던 제자 가룟유다가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췄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등과 횃불과 검과 몽치 즉 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그들과 함께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예수니 잡으라고 군호까지 짜 놓은 상태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자 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은 삼십을 주고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적의와 적대감을 표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기득권이 흔들렸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말에 복종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라 그를 따랐고, 그 분이 베푸시는 기적을 통해 많은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안전한 자리를 흔들어대는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를 보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앞세워서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돈으로 예수님을 사서 칼과 몽둥이 그리고 무리를 통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대적자 예수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방법이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인 돈과 힘과 권력을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동일하게 사용했습니다. 세상은 돈과 힘과 권력을 무기로 싸웁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 역시 돈과 힘과 권력을 무기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지키는 방법이고 수단이었습니다. 돈과 힘과 권력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 역시 그들은 정당화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그들이 안전감을 얻고 그동안 지켜왔던 종교적 기득권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돈과 힘과 권력으로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려고 있는 것입니다. 무늬는 종교인인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써서라도, 힘을 써서라도, 사람을 풀어서라도,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을 해서라도 자신들의 세상을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키려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로, 또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 하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고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치열한 세상에서 돈과 힘과 권력이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내 세상 내 나라를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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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요한복음에서 그가 베드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게 됩니다.(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이 말고였고, 베드로는 그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그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배와 그물과 모든 가족을 뒤로하고 자신의 전부를 걸고 따르고 있는 분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전부이고 생명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오실 분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해방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더 간절히 예수님을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잡혀가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그는 전부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칼과 뭉둥이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를 향해 칼로 대항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의 표현이고, 헌신의 모습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2-54절입니다. “(52)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행동을 막으시며,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에 칼로 대항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돈과 힘과 권력을 의지하여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베어냈던 그 칼,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그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방법인 돈과 힘과 권력과 군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방법으로 세워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칼로 쳐서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던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여주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군대가 없어서 세상의 방법으로 싸우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칼과 몽치를 들고 온 무리들에게 잡혀가신 것은 무력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폭력이 아니라 치유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늘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분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신 분입니다. 말씀 한 마디면 하늘의 군대를 불러 모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그 힘을 그 권력을 그 군대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베드로가 휘드른 칼에 귀를 베이자 그 귀를 만져 치유하시는 용서와 긍휼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향한 힘과 권력에 기반 한 폭력에 대항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힘과 권력을 자랑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자기희생의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뤄가신 것입니다. 곤욕을 당하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침묵을 지키며 참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기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이 얼마나 전능하고 위대한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였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돈과 힘과 권력과 군대를 동원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온갖 폭력과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옳다 여겼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가 칼을 휘두른 것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지키고 보호하려고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고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칼을 칼로 대항하는 것,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맞서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불의를 보면 즉각적으로 보복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다. 온갖 분열과 갈등과 싸움과 전쟁이 난무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세상의 방법이 아닌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가는 승리하는 삶의 비결일까요? 예수님처럼, 세상의 방법이 아닌 전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맞서지 않고,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폭력과 폭언과 협박과 조롱과 거짓이 아닌 사랑과 용서와 진리와 긍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무리 앞에서, 만약 원하셨다면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어 자신을 보호하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53절).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로 이미 결단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힘과 권력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그것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을 기억하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날마다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의 진리는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길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전적 믿음과 사랑을 통해 가능함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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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겨울,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버스를 탔습니다. 당시 몽고메리의 버스는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 버스 좌석이 백인과 흑인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로자 파크스는 흑인석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버스가 붐비자 버스 기사가 그녀에게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버스 기사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며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결국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자 파크스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다음 날 14달러의 벌금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흑인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고, 그들 앞에 한 젊은 목사가 서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몽고메리의 흑인들을 모아 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버스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승리할 것입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먼 길을 걸어 다녔으며 카풀을 조직해 서로 차를 태워 주며 1년이 넘도록 보이콧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러자 점차 버스 회사는 경제적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미국 대법원은 버스 좌석 분리는 위헌이라고 판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부 곳곳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그들을 이끌며 외쳤습니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그것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멸시하는 백인들과 힘이나 무기를 가지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행진하고 연설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1963년, 그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였던 버밍엄(학교, 공공장소, 식당, 심지어 화장실까지 백인과 흑인을 차별했던)에서 ‘버밍엄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경찰은 경찰견을 풀어 흑인 시위자들을 공격하게 했고, 고압 물대포를 발사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 킹과 시위대들은 비폭력으로 저항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체포되어 감옥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는 워싱턴 행진에서 역사적인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는 워싱턴에서 열린 거대한 집회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기 시작했습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라고 그의 연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계곡이 높아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친 곳이 평지가 되고, 우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미국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미국 정부는 민권법을 통과시켜 인종차별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 흑인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싸웠습니다. 그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어둠에 맞서 빛을 비추고, 증오에 맞서 사랑을 선택하며 싸웠던 그 전쟁에서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비폭력 운동을 통해 미국의 인종차별 철폐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차별과 억압을 극복한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랑과 용서의 방법으로 매일의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증오의 어둠을 걷어내고 주님이 보여주신 온전한 사랑의 길, 비폭력의 모습으로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생명·정의·평화를 드러내는 데 힘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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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46-54)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26: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26: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가복음 14:43-47)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14: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14: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14: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누가복음 22:48-51)“(22: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22: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22: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22: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요한복음 18:10-12) (18: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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