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7ykYzEba2I?si=xIcvFluLBUr1GKXT
■ 본문 : / 로마서 5:6-8절 / 갈라디아서 2장 20절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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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 세상에서 사시는 마지막 한 주간 동안의 삶과 행적을 묵상하며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가에 겉옷을 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습니다.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며, 스스로 성전의 주인이 되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종교지도자들의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책망하셨습니다.
화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 여러 비유와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벌이시면서 그들의 위선과 외식에 대해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으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말씀을 전하시며 시대를 분별하며 깨어있으라 경고하셨습니다.
수요일,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기기로 약속합니다.
목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시며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시며 성찬을 제정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며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고,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검과 몽치를 들고 온 군병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입니다. 밤새 심문을 받으셨고,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재판을 받으신 후,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고,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후 3시경,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신 후 운명하셨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냈습니다.
토요일,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무르신 날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 있었고, 대제사장들은 혹시라도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할까 봐 무덤에 군병들을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 날은 침묵과 기다림의 시간이었으며, 어둠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던 날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일 아침,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무덤은 비어 있었고, 천사는 “그가 살아나셨느니라”고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절망을 소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종려주일에서 고난 주간으로 그리고 고난주간이 영광의 부활주일로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고난주간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가장 깊이 드러나는 주간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자신의 생명과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로 나아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은 많은 고통을 당하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난의 주간에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신앙의 중심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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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신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점점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천국이 되어야 하는 세상은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상실함으로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난의 주간 우리는 다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원합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이 세상에 다시 예수님의 사랑을 가러올려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주간 오히려 그 십자가의 사랑에 생명으로 반응하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랑을 잃어버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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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6일, 아침 6시 5분경,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박 모(69)씨가 출근하던 중 아파트 인근 도로에서 비틀거리다가 주저앉듯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박 씨 곁으로 여섯 명이 지나갔고, 차량 석 대가 지나쳤지만 그 누구하나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차를 세우고 내리는 운전자도 하나 없었습니다. 경비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길에 그를 발견한 동료가 6시 10분경에 119에 신고해 9분 만에 응급차량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지 14분 만에 박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자가 호흡도 맥박도 멈춘 상태였습니다.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2년 전 심장질환을 앓았던 경비원 박씨는 그렇게 숨졌습니다. 급성 심정지 환자에게 산소가 공급돼야 하는 골든타임은 4분. 4분간 그를 지나친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를 도왔다면 아마도 박 씨는 여전히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사인은 심장병이었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2015년 8월 30일 중국 허난성 카이펑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60대 노인이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난 탓에 중심을 잃고 도로 한복판에서 쓰러지게 됩니다. 물에 반쯤 잠긴 노인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 곳에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행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습니다. 오토바이와 차량들도 본체만체 지나갔고, 옆에 있던 보행자 3명은 쓰러진 오토바이에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머뭇거리다가 도와주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떴습니다. 노인이 발버둥 치던 물의 높이는 단지 성인 무릎 높이만큼의 물이었습니다. 무릎 아래에 손을 내밀면 노인이 잡힐 만큼 깊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는 60-70cm 높이의 물속에서 익사한 것입니다. 뒤늦게 다른 행인이 노인을 일으켜 세웠지만 이미 호흡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이 장면은 허난성 TV 영상을 통해 고스란히 공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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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상황에서 발생했지만, 한 경비원의 죽음이나 한 노인의 죽음에서 보듯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고통에 처한 사람들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조차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곳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고 단 한번만이라도 손을 내밀어 줬더라도 그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이 없어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려졌던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주는 긍휼과 사랑이 없어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려졌던 것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세상,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씁쓸함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가슴을 움켜쥐며 울부짖고 있어도, 나만 아니면 되는 세상, 나만 안 아프면 되고, 나만 고통스럽지 않으면 되고,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되고, 나만 슬프지 않으면 되고, 나만 배부르면 되고, 나만 인정받으면 되는.. 그렇게 나로 똘똘 뭉쳐진 세상, 어쩌면 그런 세상이 지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끔씩 아니 종종 지옥에서나 겪을 법한 고통을 경험하곤 합니다. 사실 고통스런 일을 경험한 것보다 더 끔직한 일은 나의 고통에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입니다. 슬픈 일을 경험한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나의 슬픔에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누가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알아줄까요? 누가 나의 슬픔을 알아주고 나와 같이 울어주고 슬퍼해줄까요?
때론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에겐 누구보다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슬픔을, 우리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죽음과 사망에서 울부짖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자기 생명을 내놓으신 예수님...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에 무관심한 세상과 다르게,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통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 대신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 때문에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다시 일어나서 살아갈 힘을 얻고 소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어쩌면 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큰 위로요 축복이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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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6.25전쟁 중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에 다 가지도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혼자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낳고 모든 것을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그리고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 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장교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은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이제 저는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전하겠습니다.”라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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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랑을 보게 되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의 외침도 우리에게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고, 사랑한다고 수백 번, 수천 번, 수 만 번 이야기 하는 사람의 고백도 때론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이 죽음과 맞닿아 있지 않을 때, 즉 사랑이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는 자기 헌신과 희생과 연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그런 가짜 사랑을 하면서도 스스로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공허해 집니다.
그러나 아무런 말이 없어도, 아무런 결심과 각오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희생적인 사랑은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강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아기를 홀로 낳고, 자신의 옷을 벗어 아기를 감싸 안은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자기만 아는 세상, 자기만 살겠다고, 그렇게 자기로 똘똘 뭉쳐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것은 아기가 능력이 있거나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기를 가치있고 존귀하게 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추위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느끼는 추위를 더 걱정했습니다. 아기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아기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아기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자신은 추워 죽을지언정 자신이 사랑하는 그 작은 아기는 자신의 옷을 덮고라도 살려야 했습니다. 그 사랑이 생명을 걸게 하고 그를 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아들은 장성해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어머니의 사랑 앞에 감격하며 감사함으로 서 있습니다. 그 사랑의 위대함 앞에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건, 자기 목숨을 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위해 죽어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내가 죽을지언정 너는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로 여겨주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내게 가치 있는 존재다. 내 목숨, 내 생명을 내어주고서라도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난 내게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겠다. 너는 나의 전부이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너는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 로마서 5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진짜 사랑, 참된 사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 역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맞닿아 있고, 그 죽음으로 사랑이 확증 된 것입니다. 확증이란 무엇입니까? 확실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뚜렷하고 틀림이 없이 100% 참된 것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100% 참된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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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6-8절은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자기를 비워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죄가 없는 거룩함으로 충만한, 사랑으로 충만한, 진리로 충만한, 평강으로 충만한 그 곳에서 죄와 고통으로 범벅인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탐욕과 욕망과 죄로 충만한 세상이었고, 죄로 인한 고통과 상처와 아우성으로 충만한 세상이었습니다.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렇게 죄와 상처와 고통이 뒤범벅 된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으로 죽어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그들의 것을 착취하며 죄에 빠져 살아갔습니다. 이런 세상, 고통과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세상,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죄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을 능력도 없고, 죄를 돌이킬 능력도 없으며,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나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울부짖는 우리를 건져낼 구원자,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못 본척하고, 외면하셔도 되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거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절망뿐인 우리에겐 진정으로 예수님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우리가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나서도,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도,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 예수님께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 우리를 향해 더 주지 못해 안달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포기할 수 없었고,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에게, 예수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 분에게 너무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버릴 수 없는 가치 있는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 분에게 우리는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는 전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기가 불구덩이에 있으면, 엄마는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불구덩이에서 울부짖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아기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갑니다. 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아기에겐 엄마가 필요합니다. 엄마의 도움과 구원의 손길이 없으면 아기는 살아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마에게도 아기는 전부입니다. 그 아기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전부가 된 것입니다.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엄마는 아기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기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렇습니다. 별 볼일 없는 우리, 행한 것은 죄밖에 없는 우리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분에게 우리는 전부입니다. 예수님에겐 우리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게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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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죄로 뒤범벅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영적 무지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휘둘렀던 죄악의 칼날을 이제 그 분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휘두른 칼날에 베이고 상처가 나고 찢기셨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내리치던 채찍으로 그 분을 내리쳤습니다. 세상에서 받던 억울함과 고통의 울분을 그 분에게 쏟아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죄악을 다 받아내심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체휼하시기 위한 자리, 고통에 울부짖는 우리를 아시기 위한 자리.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한 자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를 향한 사랑을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세상에서 경험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친히 경험하심으로 우리를 아시는 치료자, 상처 입은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에는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이 겪는 죽을 정도의 고민과 힘듦이 있었습니다. 거절감과 배신감과 채찍에 맞는 육체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 길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돈 몇 푼에 팔아먹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언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들, 조롱하고 희롱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향해 머리를 흔들고 머리를 돌리는 사람들, 채찍으로 예수님의 살갗을 찢어내는 사람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비겁한 사람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내리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악으로 마음이 찢기고, 살갗이 찢기는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면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고 거절하고 조롱과 희롱을 하는 사람들을 단 번에 제거하시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침과 능력을 우리를 죽이는 일에 사용하지 않으시고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힘과 능력은 언제나 우리를 살리고, 치유하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일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의 누군가도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든 고통을 당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에게 죄를 행한 사람들, 그래서 그들에게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배신당하고 부인당하고, 채찍으로 맞고, 조롱과 희롱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거짓 증거로 고발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상처와 고통을 당하실 것을 아셨기에 우리를 체휼하시고 치유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당당하게 십자가의 고통을 직면하면서 자발적인 선택으로 걸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15절은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이해하시고 아시고 동정하시고,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 고통을 직접 함께 동참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고통과 고난을 겪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셔서 경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이미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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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고통과 슬픔에 빠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상함을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얻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존재였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고, 마음은 불안했고, 삶은 방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에 찔리시고 못에 찔리심으로 우리는 회복되었습니다. 그 분이 죄로 인한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의 치료가 되었고, 예수님의 피흘림이 우리의 정결함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침묵이 우리의 평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부서진 인생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이사야 53장 5-8절 말씀입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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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은 그 분을 향해 머뭇거림 없이 죄를 행하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면 그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무거운 죄책감에 매여 살아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건져내시는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며 죄를 지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외롭게 했고,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고, 누군가를 거짓으로 고발했고, 배반했고 부인했고, 거절했고, 때렸고, 옷을 벗겼고 수치감을 주고 조롱과 모욕을 주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죄인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모든 죄악의 자리에서 우리가 행한 죄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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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고난 주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더 깊이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진짜 존귀한 자로, 진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합시다.
그 분이 죄와 사망에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살게 하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은 돈에 팔리셨고, 고민하여 죽을 심정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해주는 이 하나 없는 외로움에 계셨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배신과 부인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했고, 채찍으로 쳤으며, 옷을 벗기고 수치를 주었고, 거짓으로 모함하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 고통에 계셨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체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또한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했던 사람들의 죄가 바로 우리가 행한 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찢어놓았습니다. 돈 몇 푼에 상처를 주었고 쉽게 배신하고 쉽게 부인하고 사람들을 비방하고 알지 못하는 거짓으로 누명을 씌워 정죄했습니다. 손해 볼까봐 두려워 그들을 거절하고 때리고 침뱉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해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합시다. 우리의 가족들, 주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성도들, 그리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그들을 만져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십자가의 사랑이 단지 머리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가슴으로 내려와 감격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그 사랑에 합당한 가치 있는 삶, 존귀한 삶을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존귀한 존재,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게 합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로, 그 사랑에 합당한 존귀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귀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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