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3u7-UOmDV6U?si=QOWMkGagh1zlqhfk
『 다윗의 선택의 기준 』
■ 본문 : 사무엘상 23:1-14절
“(23: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3: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23: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23: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23: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23: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23: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23: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23: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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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탄생을 의미하는 Birth와 죽음을 의미하는 Death사이에 있는 선택, Choice야말로 우리의 삶이고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니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매 순간의 선택이 쌓여 결국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때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미루고 싶을 때도 있고 회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결정을 미루는 것, 회피하는 것 자체도 우리의 선택이 됩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마주할 때에는 아무 거리낌이나 머뭇거림 없이 선택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아주 크고 중요한 일들을 마주할 때에는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고 고민하며 선택을 하지만, 선택이 어려운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매 순간의 선택이 모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되는데, 그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작고 사소한 일이든지, 아니면 크고 중요한 일이든지, 너무 힘들어서 외면하고 싶은 일이든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삶의 순간마다 했던 선택은 무엇이고,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어떤 삶의 선택을 하며,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마온황무지와 엔게디로 도피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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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사무엘상 23장, 바로 전에 나오는 22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22장의 내용입니다. 자기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며, 다윗을 죽이려했던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망갔다가 그를 알아보는 블레셋 왕 아기스의 신하들로 말미암아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 척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여 그 곳에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그를 찾아갔고, 환난 당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통한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부모님 맡겨 안전하게 보호받도록 합니다. 그 때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요새를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요새’는 물리적으로 안전한 장소로 방어 시설이나 피난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견고한 성이나 진지를 뜻합니다. 그곳에 있으면 사울의 공격에도 안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헤렛 수풀은 방어기능이 따로 없는 자연적인 피난처로 적에게 쉽게 노출되고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장소입니다. 사울에게 발각되면 언제라도 위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머물러야 할 곳은 수풀이 아니라 요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그에게 가장 안전해 보이는 요새에 있지 말고, 반대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여겨지는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순종하기도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찌되었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하여 안전한 요새를 떠나 불안정한 헤렛 수풀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윗은 많은 것을 따지거나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 전략적으로 지혜로운 방법인지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 더 안전한지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상황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안전한 요새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시고 더 강하고 견고한 요새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 뜻을 기준으로, 그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며 매 순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위험한 땅 유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유다 땅에서 사울 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울은 기브아에서 신하들을 모아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며, 다윗을 숨겨주는 이들을 처벌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사울은 도엑의 보고를 통해 다윗이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격분해 아히멜렉과 그의 제사장들을 배신자로 몰고, 그와 그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을 죽이기를 거부하지만,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 왕의 명령을 따라 85명의 제사장을 죽이고, 놉 성읍의 남녀, 아이들, 가축들까지 모두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다윗에게 도망칩니다. 다윗은 그를 찾아 온 아비아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자신이 그를 보호할 것을 약속합니다. 자신을 찾아 도망 온 아비아달에게 다윗은 아마도 빚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주다가 죽임을 당한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돕다가 죽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간절하게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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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23장 본문 말씀이 이어집니다. 다윗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 줄 견고한 요새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 왕에게 붙잡힐 수 있는 헤렛 수풀에 몸을 숨기는 위험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러자 다윗은 상황을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머뭇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다. “내가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라고 물으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어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의 안위를 생각하기는커녕 사울로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기에도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제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일이 급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이야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다른 사람을 도울 여유가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황에 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사람들이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다윗이 유다 땅에 있는 것은 사울에게 잡히면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입니다. 두렵고 불안한 상황입니다.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부하들은 그일라 사람들을 도우러 가겠다는 다윗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 사람을 구하게 되면 그 소식이 일만 만파로 퍼져 다윗의 위치가 발각되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라면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상황의 어려움을 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도 못들은 척,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의 소리에 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자기감정에 매이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묻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다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합니다. 사무엘상 23장 4절은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의 사람들과 함께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며 위험에 처했던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선택의 기준은 늘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안위나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가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고, 말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어려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압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들어 온 것도, 요새에서 나와 헤렛 수풀에 거하게 된 것도, 그일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내려간 것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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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그의 사람들이, 그의 부하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상황은 불길하게 흘러갑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게 됩니다. 2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85명의 제사장들을 모두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소식이 퍼져서 다윗을 돕거나 그를 숨겨주게 될 경우 어떤 피해가, 어떤 위험이 생기게 될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 왕이 두려워, 자신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렵고 불안한 생각에 다윗의 위치를 사울 왕에게 밀고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갔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그일라의 구원을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썼던 다윗에게 돌아 온 것은 사울 왕에게 발각되어 죽을 수 있는 상황에 몰리게 된 참으로 비참한 형국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일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급하고 급박한 상황, 다윗은 다시금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무엘상 23장 9절부터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3: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23: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23: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23: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23: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은 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의 손에 넘기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2) 사울이 내려오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 자신과 그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고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해 다윗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발각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될 위험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에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그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는 일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낼만도 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의 안위를 위해 생명을 거는 위험도 무릅썼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데,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데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거란 말인가?”라고 분노하고 탄식하며 그일라 사람들을 괴롭게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듯합니다. 내가 한 수고의 대가가, 목숨을 건 희생의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하며 슬픔에 잠겨 탄식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60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배은망덕한 그일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들에 대한 응분의 일을 행한다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3장 10절에서 다윗의 기도 가운데 참으로 이상한 부분이 나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오는 것은 자신을 잡기 위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께 엎드려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다윗은 자신의 안위보다 그일라 사람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2장에서 보면 다윗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85명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에 의해 잔혹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일이 다윗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일라 사람들도 다윗을 숨겨주거나 도와주게 되면 그들 역시 사울 왕에 의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치는 것보다 그일라 주민들이 다치면 어찌하나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 때문에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 왕에 의해 진멸당하면 어찌하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감사해서 그를 숨겨주거나 그를 도와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 것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자신을 사울 왕에게 밀고해서 그일라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안위를 얻을 수 있으면 그것이 더 낫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감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베푼 은혜에 매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섬기고 수고한 노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사람들의 안위와 생명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사람 육백 명을 데리고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 사울을 피할 수 있는 곳,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 갑니다. 다윗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면서 또 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울 왕은 매일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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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다윗의 선택이 무엇이며,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1. 다윗의 선택과 그 기준 : 하나님 말씀
다윗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이는 상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자기감정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주저 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지연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22장에서 위험해 보이는 유다 땅으로 돌아갈 때도, 견고한 요새에서 나와 위험이 도사리는 헤렛 수풀로 갈 때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사람들의 소리, 자기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분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손해가 있고, 불안하고 두렵고,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갔습니다. 23장에서도 23장에서 다윗은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께 묻고 그들을 구하러 나아갑니다. 자신의 위치가 사울 왕에게 발각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도래된다 해도 어떤 손해가 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 묻고 순종합니다. 상황은 다급해지고 그를 만류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두렵고 불안한 감정이 업습해도 그는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승리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매 순간 선택하며 나아갑니다. 우리 역시 매순간 선택을 할 때 자신의 판단, 감정이나 세상의 방법이나 열리는 상황이나 사람들의 조언에 의존하려 합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는 자리에 있습니까?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준,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다윗의 선택의 기준은 :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책임감과 사랑
다윗의 선택은 자신의 안위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며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22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가족과 그를 찾아온 억울함과 고난 속에 있는 400여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능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그를 섬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모압 왕에게 맡기며 보호하려는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23장에서도 다윗은 그일라 성읍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자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구합니다. 그는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다윗의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자신이 배신을 당하고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안위, 자신의 유익, 자신의 감정보다 그는 늘 공동체의 안위, 공동체의 유익이 자신보다 먼저였습니다.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책임이 그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체를 향한 섬김과 사랑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 기준이었던 다윗을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ㅗ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갔던 다윗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돌보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추격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살아갈 수 있었고, 사울은 다윗을 찾지 못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더 위험하고 손해 보는 것 같이 생각되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다윗처럼 무엇을 선택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기 원합니다. 나보다 공동체의 안위와 평안을 우선으로 삼기 원합니다. 이것이 손해가 되고 이것이 억울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생명을 지키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윗처럼 매 순간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묻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지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되길 원합니다. 삶의 모든 결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구합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선택을 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가장 선한 길로 우리는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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