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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쓴 성경이야기

풀어 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 했다. 물론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그가 질문한 내용에 대한 대답을 되받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물음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학자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조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고 확증하신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대답이 올바른 답이었다는 것을 인정받은 율법학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 다른 질문을 한다. “그럼 누가 제 이웃입니까?”

이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37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6명이상이다. 첫째는 강도들(복수)이고, 둘째는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고, 셋째는 한 제사장이며, 넷째는 레위인이고, 다섯째는 사마리아인이며, 마지막 여섯번째는 주막주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풀어감으로써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강도의 피해를 받은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강도들에게 빼앗기고, 얻어맞고, 죽어가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럼 이 사람의 고통은 어디 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 사람의 고통은 강도들의 죄에서 비롯되었다. 강도들의 죄는 그들의 정욕과 탐심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그들의 욕심은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고 결국 그들의 정욕이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은 한사람을 만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고통과 아픔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들의 정욕이 결국 죄를 낳았고, 그들의 죄는 타인에게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영안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죄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두려움과 양심의 고소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한 무리의 죄는 그 일과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강도들의 죄로 인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한 사람이 누워있다. 그는 자신의 것을 모두 잃었다. 아니 잃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다. 자신의 것들을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억지로 넘겨주어야 했다. 자신의 옷은 벗겨졌고, 그의 것이 강압적으로 빼앗길 때 그는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강도들의 죄는 그 사람에게 깊은 수치심과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 이것은 죄의 흔적과 결과물들이다.


(* 이것은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먹음직)과 안목의 정욕(보암직)과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한)을 얻기 위해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오직 진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만 속해 있던 선악을 아는 권한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들의 욕심은 하나님의 떠나는 죄를 낳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들은 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슬픔의 상처를 남겼고, 자신들에게는 옷 벗음을 인식함으로부터 오는 수치심과 죄에 의해 생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 서로에 대한 관계 단절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이렇듯 모든 죄의 결과는 고통이며 아픔이며 상처이다.)


강도 만난 자는 거의 죽어가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있었다. 그의 상처는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만한 것이었고, 그의 상태는 모든 사람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바로 그때.......

첫 번째 사람 제사장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처입어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는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봄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지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는 직분을 감당했다. 제사장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때 레위지파였던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분이 주어졌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 후로 제사장은 레위지파 사람들 중에서 선출되었고, 그들은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섬기는 특권을 가진 자들로 성소에 대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특권을 가졌던 그 제사장이 고통으로 죽어가는 사람 곁을 그냥 스쳐서 지나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제사)를 집례하고, 갈 길을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후에 자신의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성전 안에서는 예배의 중재자로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예배는 진정과 신령으로 드려진 예배가 아니었고 그의 삶 역시 살아있는 제사로 하나님께 올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예배를 드린 후에도 하나님과 연합된 사랑의 기쁨을 가지지 않은 듯 하다. 왜냐면 사랑의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이 넘쳐 나오기 때문이다. 예배로 인한 사랑의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이 그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사랑과 긍휼로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예배는 결국 진정과 신령이 빠져 있는 헛된 것이었음을 삶속에서 드러내었다. 왜냐면 예배로 회복되어진 삶의 반응이 그에게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슴은 무관심과 냉담함으로 완악해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예배를 단지 그가 처리해야할 하나의 일로만 형식적으로 드렸기 때문에 예배로 인한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이 그 안에서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제 오늘날에 적용하여 예를 들어보자.

어쩌면 제사장의 직분은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와 같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특권을 가진 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매일 새벽 설교를 준비해야하고,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와 금요예배를 집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매일의 삶은 거의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그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누구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며, 성도들과 하나님의 중재자로서 처리해야 할 많은 일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머물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역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 없이 예배를 집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해져 있고 예배를 집례 하는 중에도 기쁨과 감사를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처리해야할 하나님의 일과 사역 때문에 매순간 지쳐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부담과 짐으로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힘과 능력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그들이 책임졌던 예배의 집례를 통해 회중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그들은 남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예배를 전파한 후에 도리어 자신이 버림이 되어버린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제사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삶 가운데서 실행되어지지 않은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가 사랑의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연합을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강퍅해져 있으며 그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제사장은 그의 사랑과 도움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던 대상을 회피하여 버림으로 그는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이라는 대상으로 인식될 만한 자격도 함께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불릴만한 자격도 잃었고 또한 강도만난 자를 이웃이라고 불릴만한 자격도 함께 성실해 버린 것이다. 그의 무정함은 결국 그에게 이웃이 되기에도 부적절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었고, 그는 ‘이웃’이라는 이름도 가지지 못하는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