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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youtu.be/FNeVTnDa9Vg

 

 

 

이틀 후면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영어로는 크리스마스라고 하고 사람들은 이 날 이렇게 인사하죠. “메리 크리스마스”. 다 아시겠지만 메리크리스마스는 3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리(기쁜, 즐거운)+크라이스트(그리스도 예수님)+마스(미사-예배)”그래서 우리가 흔히 성탄절에 나누는 인사 메리 크리스마스의 뜻은 기쁜, 즐거운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 또는 기쁘게 예수님을 예배하세요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하지만 진정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찾지도 모시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에게는 연인과의 데이트가,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서로에게 받을 선물이 그 주인공이 되어버리기도 하죠. 이번 성탄절은 진정으로 기쁘게 예수님을 예배하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절망 가운데, 오히려 뚜렷이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 하십시오.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하고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런 어둠의 시간은 비로소 우리의 육신의 눈을 감게 하고, 영적인 눈을 열게 하며, 육신의 귀를 닫게 하고, 영의 귀를 열게 하는 기적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런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남자가 나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당시 유대의 결혼 풍습은 남자와 여자가 정혼하고 1년 후에나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정혼 기간 동안 서로의 순결함과 정결함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결혼을 하여 합법적인 부부가 됩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을 하고 결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고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입 밖으로 말은 안했지만 정말 마음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하고, 동침한 적인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마리아에 대한 격한 배신감과 분노로 그의 마음은 정말 혼돈스럽고 절망스럽고 침울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지탄거리가 되고 멸시와 조롱 뿐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너무나 부정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일을 어떻게 해결하고 풀어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해보고 고민에 고민을 더 해보아도 도무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다보면 이런 경우를 마주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막막한 두려움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요셉도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마리아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자신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대가로 분풀이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기로 합니다. 오히려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죽음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마리아를 보호하기위해 그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선두에 서서 마리아를 지탄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요셉을 향해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압니다.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상황과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들, 그리고 짓밟힌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이런 고통의 문제를 가져온 마리아를 비방하고 군중의 무리에 섞여 함께 손가락질하며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상황과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이 아닙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상황을 보고 듣고 있음에도 상황과 자기감정에 압도당하기보다 불쌍한 마리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정은 그녀를 가만히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프고 자신이 죽을 듯이 힘들어도 그녀를 지켜주며 그냥 놓아주는 일이 서로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셉은 그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 생각을 놓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의 고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 절망과 어둠의 시간에 그에게 주의 사자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전해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에게 선포된 놀라운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마리아의 임신이 비판의 대상이고 풀기 어려운 숙제였고, 고통과 모든 근심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요셉 역시 그 분제로 인해서 너무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임신한 마리아는 창피한 수치와 고통과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놀라운 기적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는 은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그 은혜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요셉은 이미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결혼할 여인 마리아가 낳을 아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선포될 것이고 그 것이 온 세상에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인지 이미 그에겐 주어진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 될 것이고 그 아기의 아빠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한낱 한숨이고 고통이고 무거운 짐이며 걱정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어둠의 시간 요셉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셔서 그것은 기적이고 놀라운 축복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은혜는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대가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된 '은혜'와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진 '은혜'는 참으로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아지고 걱정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감정도 요동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항상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관점이 아닌 비로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그 은혜는 진짜 은혜로 깨달아지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오셔서 한국에서 큰 교회의 영어예배를 담당하고 계셨는데 하나님을 향한 그 분의 열정과 말씀이 좋아서 그 분의 설교를 찾아 듣고 했었습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제 안에 살았기에 나누고자 합니다. 목사님의 사모님은 쌍둥이를 임신하셨고 너무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쌍둥이 중의 한 아기가 사모님의 태중에서 사산되었고, 사산한 아기와 함께 있을 경우 다른 한 명의 아기도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수술을 하여 아기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 아기의 체중은 900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엠마였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살아있는 아기 '엠마'는 패혈증에 걸렸고 아기의 내부 장기들이 패혈증에 의해 조금씩 그 기능을 멈추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엠마와 관련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간증을 하셨습니다. 아기가 병원에서 집으로 올 때 목사님은 내심 부담과 걱정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분주하게 사역을 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는데 아기가 집에 오는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엄청난 일이 쏟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아기의 울음소리로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별로 기대도 안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고난이 시작이구나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기가 패혈증에 걸려 아기의 내부 장기가 하나씩 기능을 멈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엠마의 신장 기능이 멈추자 목사님은 지겹게만 여겨졌던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아기의 폐 기능이 서서히 멈추자, 아기가 스스로 호흡을 하고 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은혜였는지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하루 종일 기저귀를 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엠마가 소변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하나님~ 우리 엠마가 하루 종일 울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호흡기를 떼고 숨만 술 수 있다면, 튜브를 빼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입니다. 목사님은 비로소 그 어둠과 절망의 시간, 하나님이 이미 주셨던, 아니 모든 순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썩게 하는 배우자 자녀들, 부모들, 가족들, 고민이 되는 문제들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은혜인지, 정말 이 은혜가 엄청난 것임을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고 그저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불평하고 고민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며 무엇 하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고 감격하지 못하며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고, 조금만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도, 한 발자국씩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도,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도, 아기의 웃음과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화장실을 오갈 수 있는 것도 모두가 그저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린 것도 아픈 상처를 갖게 되는 것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야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왜냐면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무감각하고 무뎌있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깨어남이 일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알게 되고 그 모든 것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며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임을 말씀하는 주의 사자는 부정한 여인으로 생각되었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전부를 건 믿음의 여인이며 정결함과 순결의 여인임을 말씀해 줍니다. 그녀에 대한 요셉의 모든 의구심을 해소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잉태한 아기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첫째, 21절에서 보면, ‘예수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고 무엇을 향한 구원인가? 를 알아야만 우리는 구원의 이유와 그 목적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문제 해결자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그리고 그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저 올려 거룩함과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죄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집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 올리셔서 영원한 생명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둘째, 2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시고 성취하신 분입니다. 성경의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하심을 보여주시고 증거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어떤 상황과 어떤 문제보다도 크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말씀은 너무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너무 멀게 느껴지고 나의 인생과 별로 상관없이 여겨지지 않습니까? 쉽게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죄는 그렇게 죽음을 향해 우리를 이끕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에서 그리고 그 죄의 결국인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한 그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안전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일지라도 주님이 받아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다면 우리의 어떤 죄도 그 분 안에서 용서될 수 있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그리고 그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해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인지를 증거 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믿게 됩니다. 그 분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실제이며 예수님 안에서 모든 약속은 반드시 확실하게 성취되고 이루어질 것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고 함께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한 분입니다. 확신반을 할 때 모든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녀 중에서 하나만 지옥에 보내야 한다면 누굴 보내시겠습니까? 그러자 한 분만 빼놓고, 모두가 다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자식들 중 누구도 보낼 수 없다고... 자신이 대신 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자식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십자가에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내가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 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나의 아들의 생명을 주기까지....내 아들을 죽음의 고통가운데 내어주는 그 엄청난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죄에서 돌이켜 그 분의 품으로 걸어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알기에 그 분께 나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며 신뢰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이며 가치 있는 자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한 그 분 안에서 소망과 담대함을 가지고 결코 우리를 포기 하지 않고 함께 하시는 그 분 안에서 우리는 힘과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주의 천사는 그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어떤 분인지 말하여 줍니다. 그렇게 된 후..요셉은 변화됩니다.

 

 

예수를 만난 자들은 반드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났습니다. 잠자기 전에 있었던 모든 근심과 고통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자 그것은 은혜이고 감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오늘 말씀 24~25절을 보면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녀는 이제 그의 고토이나 아픔이 아니라 은혜와 기적의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고 낳은 후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 그는 꿈에서 깨어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으로 아픔으로 문제로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당연히 마땅히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리아를 데려온 후에 그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예수를 돌보고 보호하고 섬기는 일에 평생을 살아갑니다.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내려가 호적을 하고 그곳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장소인 마구간 말구유를 준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의 생명을 위협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낯선 땅 애굽에 내려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한 것도 요셉이었습니다. 또한 그 곳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족을 이끌고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요셉에게 주신 일이었고 그는 모든 일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삶이 변화되어집니다. 은혜를 깨닫고 발견하는 일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매 순간 아니 모든 순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펑펑 부어집니다. 아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깨닫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을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땅히 순종하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격동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제한하지 않으며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덮어줌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을 드러내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여인이라고 낙인찍는 대상을, 나에게 아픔이 되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자들 안에서 조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소망했던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도 우리에게 감탄을 자아내지만, 동침한 적이 없었음에도 결혼을 약속했던 사랑하는 이의 임신소식에 분노와 배신감으로 격동하는 감정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또한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요셉의 믿음 또한 감탄할 정도로 순전하고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자신의 삶을 드린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상황과 자신의 감정과 이성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따랐던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저의 인생도 그랬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 문제와 상처 속에서 저는 오히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신실하심과 나를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으시는 그 분의 넓은 품을 보았습니다. 내 삶의 변화는 나의 노력이 아닙니다. 나의 의로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 문제의 절망 속에서 나를 안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그 분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로 만들어 가셨고,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었고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은혜가 나를 빚으시는 것입니다.

 

일본의 여류 소설가 미우라아야꼬의 이야기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녀는 '빙점'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신실한 크리스천이 된 것은 지독한 질병 중에서였습니다. 그녀는 20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 네살 때부터 13년 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또한 그 후에도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 그녀의 육체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녀는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있게 되면서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시간동안 남다른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고통이 오히려 축복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간이 그녀 자신의 삶에 부어진 모든 것, 고통과 질병일지라도, 이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질병 중에서 그녀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 뿐 이었습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 후 남는 것은 쌓아온 공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것들뿐입니다."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 볼 수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라고...

 

저는 한마디 더 붙이겠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아프지 않고서는, 저는 그 분의 은혜를 발견할 수조차 없는 영적 교만에 죽은 자였고, 무감각한 자였다고....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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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