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가진, 전부를 가진 자
본문 : 출애굽기 4:1~17
몇 일전 정승희 선교사님의 장례 소식과 입관 모습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먼저 얼마 전 장례를 마친 배길호 선교사님께서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철효야, 코로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조문 와서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줘서 고마워. 입관식 때 너의 기도가 가족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고, 정승희 선교사 장례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치러졌어. 아내는 충북 음성에 대지공원묘원 양지바른 곳에 잘 안장되었어. 아내의 묘비에는 “거룩한 씨앗을 심은 주님의 사람 선교사 정승희”라고 되어있고, 거룩한 씨앗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섬겼던 선교사의 삶이었기에 적당한 말인 듯 해. 아내가 고통과 눈물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 품에 안겨있다고 생각하니 떠나보내는 마음은 평안하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집안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계속 아내 생각이 나네. 1년 6개월 정도를 아내와 집안에서 혹은 병원에서 함께 생활했기에 집안에서 나눈 얘기와 물건들 그리고 추억들이 계속 생각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어. 우리 아이들도 1년 6개월간 엄마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조금씩 했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나 봐. 엄마가 아플 때는 종종 눈시울을 적시더니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후로는 눈물 없이 평안히 일상생활을 하고 있어. 지금은 학교공부와 인턴 등의 활동으로 매우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고. 아내 사망신고를 하고 아내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는 금융권과 자동이체로 공과금을 내는 곳들 모두 연락을 해서 명의를 변경하거나 해지를 하고 있어. 아내의 물건들도 깨끗이 정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아내 없이 아이들을 돌보며 주부의 역할을 잘 해보려고. 그동안 양문교회성도들과 함께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후원해줘서 고마워. 앞으로 얼굴보고 인사 나눌 시간이 빨리 오기를.“
우리 중에도 많은 분들이 필리핀 세부에 가서 배길호 선교사님과 정승희 선교사님의 사역현장인 거룩한 씨앗학교와 크리스챤펠로우십 교회가 얼마나 잘 세워져가고 있는지 보고 오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너무 잘 사역하고 계셨고, 필리핀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모습도 대단했습니다. 4년 전인가요? 사실 저는 정승희 선교사님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했고, 혼돈스러웠습니다. 성경을 읽고 가르쳐 왔지만 실상, 이런 고통이 가까운 친구의 일이 되고 내 삶에 피부로 느껴지자,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힘들었습니다. 입관을 위해 장례식장에 가서 배길호 선교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배 선교사님 역시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고 해답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제 아내 정승희 선교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이었고 열심을 다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암이 걸리고 나자 저도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 보다 주변 사람들은 더 했어요. 어떤 친구는 ”그렇게 사역을 잘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네.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한테 어떤 유익이 있는 거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데에 있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라고 말하며 저보다 더 화를 내고 속상해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질문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었고 그리고 지금은 해답을 받았습니다. 제 아내는 항상 하나님 은혜에 열심을 다해 무언가를 해드리고 갚아드려야 할 것처럼 살았습니다. 선교지에서도 그랬고 병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서도 아픈 몸으로 아들과 딸을 챙기고 돌보았습니다. 암으로 고통이 심해질 때조차 온전히 자신의 정신으로 있고 싶다고 진통제를 맞으려고 하지도 않은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그렇게 항상 자신의 능력과 힘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용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암으로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면서, 걸을 수 없게 되고 눈도 한쪽이 볼 수 없게 되면서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능력을 발휘할 때도, 그러나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능력을 다해 열심히 살 때도, 그러나 우리가 무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동일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1년 6개월 동안 힘겹게 투병하면서 얻은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하고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오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고,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로 와서, 성장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똑똑해서 잘 사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마주하며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배우고 그 분께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요즘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모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애굽의 왕자로서 그러나 동시에 살인자요 초라한 도망자로서 미디안에 머무는 모세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부터는 그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바로의 앞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는 담대한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로 출생해서 처음부터 나일 강에 던져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죽음이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생명을 연명합니다. 당시 세상의 가장 강대국 중의 하나인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죽음을 선포했지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하는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과, 지금까지 육체적으로든 마음으로든지 상처입고 아파온 수많은 질병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온 것이 우리였습니다. 죽음 가운데 던져졌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쌌고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를 사탄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모세는 성장하면서 애굽의 왕궁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가장 강대국 중의 강대국인 애굽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하나인 왕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학문을 배우고 교육을 거치면서,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가진 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 그가 꿈꾸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친모이면서 유모였던 요겟벳으로부터 들어왔던 비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신다고 들어왔던 일. 그것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를 보아도 그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인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귀 기울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였고, 그가 바라보고 주목한 것은 자신의 능력과 권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나은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가능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과 능력과 권력으로 하나님보다 앞서 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긍휼한 심령이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인에게 맞고 있는 그의 형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려고 애굽인을 쳐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이끌 지도자로 추앙받기는커녕 그들에게 거절받고 살인죄는 탄로나 바로가 그를 죽이려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결국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이 40년,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힌 시간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이 시간 동안 그가 한 것은 십보라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고,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40세까지 배워왔던 모든 교육과 훈련은 미디안광야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입었던 화려한 옷도 양치는 목자로 전락한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천조각에 불과했고, 그가 누렸던 권력과 영화는 찾아볼 수도 없이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80이 되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화려한 겉껍질을 벗는 시간, 그리고 초라하고 무력하고 무능한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 40년이라는 시간동안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정말 이룬 것이 하나 없네.“라고 스스로 푸념할 때가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지금껏 쌓아올렸던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과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깨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했던 순간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거절 받고, 외면 받고, 무시받으며 외로운 나그네처럼 속앓이를 해야 했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가오셔서 저를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직접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사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절하는 모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가 내게 나타나심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심으로, 그의 손에 나병이 생기게 하셨다가 회복시키는 표적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믿게 하겠다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그래도 믿지 않으면 나일강 물을 피가 되게 하심으로 믿게 하시겠다고 확증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번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내세워 하나님 말씀을 거절합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이고, 주께서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무능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에게 표적을 행하신 전능하신 분, 입을 지으실 뿐 아니라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을 만드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거절할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의 연약함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는 보냄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잘못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끈질긴 불순종의 씨름 앞에서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노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고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므로 그들이 행할 일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여 줍니다.
우리의 삶도 모세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학식과 소유의 많음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라며,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우리는 뿌듯해하고 자랑하며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다가 어떤 순간에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자랑하고 의지했던 것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삶의 암흑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차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한탄하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며 헛된 시간을 견디고 보내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고 인내해 주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가장 깊은 곳을 만지시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힘을 빼는 시간입니다. 화려함으로 치장한 겉모습이 아니라 무력하게 발가벗겨진 무능력하고 초라한 우리 자신을 직면시키는 시간입니다.
민수기 12:3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이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양을 치던 40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온유는 사실 내적인 유약함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인 연약함을 외적인 강함으로 표출하는 위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적인 강인함을 애써 외면하고 숨기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속임도 아닙니다. 진정한 온유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길들이는 내적 강인함에서 기인된 능력이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시키는 내적인 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온유는 하나님의 권위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복종시켜 나가는 내적 강인함과 내적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온전히 자신을 길들이는 능력입니다. 온유함이란 마치 사나운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카우보이는 사나운 말에 안장을 얹고, 그 말 등에 올라탑니다. 그리나 카우보이를 태운 야생마는 그를 떨어뜨리려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등 위에서 자신을 귀찮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우보이는 야생마의 사기를 꺾어 놓을 때까지 단호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물론 카우보이는 야생마의 힘을 제거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카우보이에게는 강한 야생마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야생마의 힘이 아니라 그의 강한 고집과 자기 뜻에만 집착하는 의지입니다.
사실 카우보이는 야생마의 완강한 의지를 꺾어 자신의 뜻대로 야생마의 넘치는 힘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카우보이가 야생마의 의지를 완전히 꺾는다면 이제 그는 야생마를 자신의 권위와 통제아래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야생마가 카우보이에게 길들여졌다고 해서 고집이 꺾인 야생마는 자신의 힘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힘은 유지하되 다만, 카우보이를 대적하는 그의 고집과 의지가 꺾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일단 야생마가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인에게 길들여지면 그 야생마의 엄청난 힘은 그를 길들인 바로 그 카우보이가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야생마는 그를 길들인 카우보이의 권위아래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생마는 자신 안에 있는 넘치는 에너지와 힘을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주인의 뜻대로 그리고 그 주인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게 됩니다. 온유함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시킴으로...자신 안에 있는...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와 능력과 힘을...자신의 뜻이나 고집대로가 아닌....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에 의해 사용될 수 있도록....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내적 강인함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런 과정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남에 기뻐하다가, 또 때로는 우리의 못남에 슬퍼하다가, 또 때로는 우리의 부요함을 자랑하다가, 또 때로는 우리의 가난을 수치스러워하다가, 또 때로는 우리의 능력을 뽐내다가 또 때로는 우리의 무력함에 풀이 죽어 있다가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느라 늘 잊고 계셨던 분, 그러나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빼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온유함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가졌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많이 배우고 더 능력이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더 잘났는가? 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뽐내는 모든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먼지털보다도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덜 배우고 능력이 부족한가도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전능하신 온 세상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난 척 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주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며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과 돈과 지혜가 필요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시는, 우리 곁에 머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것을 배울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과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신다는 것을.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하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가지고 다른 것을 전혀 가지지 않는 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가지고 다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만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가진 것이 아닙니다.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 하나님과 다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배우자 그리고 이상적인 직업까지 가진 사람이 하나님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진, 그래서 전부를 가진 모든 것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길 기도합니다.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벨탑 건설을 그치게 하시는 하나님(창 11:1-9) (0) | 2021.12.09 |
---|---|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가치(다니엘 3:1~30) (0) | 2021.08.25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한 사람의 영향력(사도행전 10:1~8) (0) | 2021.04.08 |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기도의 자리(행 12:1~19) (0) | 2021.03.25 |
이삭의 우물(창세기 26:1~26) (0) | 2021.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