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가치(다니엘 3:1~30)

https://youtu.be/DVXmugnU6-E

 

본문 : 다니엘 3:1~30

 

조개의 진주는 고통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조개가 껍질을 벌리는 행동을 할 때 모래알 같은 이물질이 보드라운 살에 박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깔깔한 모래알이 조개의 약하고 보드라운 살에 박히게 되면 조개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살 속에 박혀 아픔을 주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의 살을 썩게 하고 병들어 죽게 합니다. 반면 또 다른 선택은 조개가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개는 자신의 살에 박혀 고통을 주는 모래알을 덮고 싸기 위해 진주층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동안을 계속해서 생명의 즙으로 모래알을 감싸고 또 감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 가지고 가는 진주를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르는데요, 아마도 사랑하는 딸이 시집살이를 하다가 속상할 때 조개가 자기 안으로 들어온 모래로 인해 받는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든 것처럼 참고 견뎌내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들의 이름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오히려 그들은 고통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고통의 위기 앞에서 선택한 길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이들의 모습과 이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 역시 믿음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결단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다니엘 31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엄청나게 거대한 신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팔과 피리와 많은 악기의 소리가 들리면 그가 세운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나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누구든지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엄포합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에 따라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시기하던 몇몇 갈대아 사람들은 그들을 참소했고 결국 그들은 왕 앞에 끌려 나오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을 지켰던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형통함이 아니라 왕의 진노였고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럴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했는데 축복은커녕 삶의 고난이 찾아오고 힘겨움과 어려움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평안한 삶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는 역경이 우리 앞에 펼쳐진 적은 없습니까?

 

사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통은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통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서 면제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유익이 아닙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통이 없는 삶, 문제가 해결되고 어려움이 없는 삶을 꿈꾸지만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모두 치유 받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질병과 가난과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그 고통을 견디는 방법, 고통 중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유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순간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해야 하고 견뎌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통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셨기에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을 십자가 죽음이라는 최고의 고통에 내어던지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고통에서 면제되고 해방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예수님처럼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고 고통 속에 들어가서 즐거움과 기쁨으로 고통을 인내하고 견뎌내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시기에 실로 만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공과 부요를 보장받기보다 생명을 위협받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현실이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심함으로써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기 때문에 비난과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세상의 기준과 다른 기준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통이 와도 요동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어떤 고통이 와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의연한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그들의 결단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 하는 대신 그들에게 오히려 큰 고통과 죽음의 위험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이 모든 상황의 주관자,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장하시는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의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에서도 그 분을 붙잡을 수 있고 그 분의 기준을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펼쳐져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든 상황과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권자 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2) 고통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자신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진노한 느브갓네살 왕은 갖은 회유와 설득과 위협의 방법으로 신상에 절하도록 도전을 받습니다. 다니엘서 315절을 보면 느브갓네살의 회유와 협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대답합니다. 16절부터 18절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힘이 없는 신이 아니라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질지라도 거기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해 내주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설령 그들의 원함대로 풀무불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기에 굳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을 따라 구차하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상에 절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은 어떤 고통의 위협이 찾아와도 그들은 결코 요동하거나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자꾸 흔들리고 요동하고 무너지고 좌절합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주권자 되심을 믿는 살아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3) 고통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보호하시는 주님과 함께 견디십시오.

 

마침내 그들은 분노한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풀무불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결박당한 채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풀무불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결박은 풀어지고 자유함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곁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자유함을 얻고 모든 매임이 풀어집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아무리 강하고 위협적일지라도 그들을 상하게 하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상시 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느브갓네살은 그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을 보고, 또한 풀무불속에서도 전혀 타지 않고 상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풀무 불에서 건져냅니다. 그리고 느브갓네살은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으며, 또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더 높은 자리에 앉혀 그들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통은 우리를 상하게 하거나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유함을 얻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매일 수 없고 묶일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가치입니다.

 

느브갓네살이 놀란 것은 풀무불이 갑자기 꺼지고 그들의 고통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믿은 다니엘의 세친구가 보여준 모습과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견딜 수 있었고, 모든 묶임이 풀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고 철저한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기에 세상의 방법을 거부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아예 고통을 허락하시지도 않고 편안하고 안락하고 성공한 삶을 보장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아니 때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그들을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고통에 메이거나 묶이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며, 비록 상황과 환경은 힘들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중심은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져서 세상을 하나님 안에서 이겨가는 모습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고통과 위험의 상황을 없애주시거나 제거해 주시는 대신, 오히려 어떠한 고통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들이 그 고통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그분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통과 위험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상황을 견디며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지? 나 같으면 벌써 자살을 하거나 도망가 버렸을 그런 어려움과 힘든 일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저렇게 웃으면서 마음의 요동함 없이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도 그 비결을 알고 싶다~"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빚어지길 원하십니다.

 

어려움과 극한 고난 속에서도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강인한 하나님의 용사들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강인한 용사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그러한 용사들을 영화로운 자리에 앉히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 고통 안에는 어떤 특별한 가치, 우리가 배워야 할 소중한 가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이 몰아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는데 그 속에 있는 가치를 발견하거나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처럼 속상하고 억울하고 두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억울함과 원망과 불평의 소용돌이에 갇혀버릴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가치는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의 철저한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인간의 생각으로는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가장 큰 축복의 통로이지 위장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은 실상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일 년이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우리의 기대는 무너지고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는 우리의 바람이나 노력과는 다르게 점점 더 심각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과 염려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고통의 상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힘든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이 현실을 끌어 앉고 여전히 보이지 않으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며 이 시간을 인내함으로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이 고난의 시간 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한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환난과 고통은 그 뒤에 반드시 선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주권 하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난과 고통이 우리의 삶에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기를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삶에 부딪혀 오는 모든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의 열매를 거룩한 연단의 시간을 그리고....부활의 소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매들은 삶에 일어나는 환난과 고통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선한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 안에서 진실로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것임을 드러내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재창조하는 것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고통은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못하는 아니 우리를 더 못난 존재로 끌어내리는 몹쓸 것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남기는 것입니다.

 

 

 

-------------------------------------------------------------------------

 

(다니엘 3:10~30)

 

(3: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3: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3: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3: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3: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3: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3: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3: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5:1~4)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