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본문 : 열왕기상 19:1~2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 적이 있습니까? 하나의 의미 없는 몸짓과 같이 무의미한 존재의 이름을 불러준 것 때문에 그가 생기를 찾고 활력을 얻어 아름다운 꽃이 되는 일을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나를 알아봐 주고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때문에 내가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고 특별한 존재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그분의 세미한 음성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절망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던 자에게 소망과 담대함을 줍니다. 생기 없이 살아가는 자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명을 줍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엘리의 시중들던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사무엘을 찾아가셔서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삼상 3:1~12)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이름도 없이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찾아가셔서 호렙 산,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사무엘이나 모세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사람으로 그 분의 손에 붙들리게 됩니다.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때 그들은 완전히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담대한 힘을 주십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있느냐?”고 찾으십니다. 또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하나님에 대해 분을 품고 안색이 변하여 있던 가인에게 찾아가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많은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하여 그 분의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게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보다 그 분의 세미한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상황이 변화되고 획기적인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꼼작하지 않던 우리의 마음이 “내 사랑하는 딸아~”“내 가여운 딸아~” 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완전히 마음이 녹아져서 그분께 반응하게 된다는 것을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살아오면서 너무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싱가포를에서 조깅하다가 “내 말은 사람의 말과 같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내면 깊숙이 들려온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믿어지게 되는 믿음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요 하고 울부짖는 내게 다가와 “내가 알지 내가 네가 고통받는 모든 순간에 너와 함께 있지 않았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에 모든 억울함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었던 엘리야 역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절망과 우울 속에 앉아 있습니다. 나만 여호와 당신을 위해 유별난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제단을 허물며 예배를 외면하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당신의 말씀에 귀를 막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했건만 내 생명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억울합니다. 속상합니다.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진 이 선지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시 일으키시고 다시 살게 하셔서 그 분의 사명을 다시 감당하도록 만드셨을까요? 함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깊은 우울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귀찮아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모든 것과 단절하고 싶어지고, 그저 깊은 동굴과 같은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서 말없이 한숨을 토로하며 때론 죽음까지도 갈망하는 그렇게 깊은 우울로 자신을 내팽겨 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참으로 당혹해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자기 정죄감과 수치심이 들고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낙심하며 때로 식음도 전폐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송구한 마음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안목의 두려움 등의 감정들이 뒤얽혀 때론 더 깊은 우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갑니다.
성경에도 깊은 우울감에 매여 하나님께 심지어 죽여 달라고 호소한 이가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선지자들의 대표라 칭할 수 있는 엘리야였습니다. 그는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조차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우울을 경험하였고 그로 인해 아무도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가져가 달라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그는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인과의 대결에서 여호와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보이고 그곳에 모였던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한 명도 남김없이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보이신 기적의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 왕과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는커녕 그리고 엄청난 기적을 나타내 보인 선지자 엘리야를 극진히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그를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엘리야의 성공적인 사역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로 바뀐 것입니다. 아합 왕의 부인이었던 이세벨은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함으로 엘리야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엘리야의 성공적인 사역의 결과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 증거가 된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이려는 이유와 음모로 변화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극한 두려움과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담대히 치러내고 그들의 생명을 담대하게 취했던 그였지만, 이제 그의 용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야 하는 초라한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통해 얻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모든 기대는 한꺼번에 무너졌고 그러한 마음의 무너짐으로 인해 그는 두려움과 낙심 속에서 스스로 깊은 우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들어간 그 깊은 곳에서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따스한 은혜를 경험하고 결국 하나님과 만나게 되고 그분을 경험하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때에 우울은 이렇게 찾아오곤 합니다. 고통과 상처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기대와 소망을 품고 인내로 모든 것을 견디고 견디어 왔건만 자신의 희생과 인내의 결과가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되었을 때, 또는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외면과 거절을 당하게 되었을 때, 모든 열정과 힘을 다해 성공적인 사역을 이루었음에도 오히려 비난과 멸시함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낙심과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 낙심과 절망은 우리에게 우울함의 옷을 입히곤 합니다.
열왕기상 19장 3절에서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고 자기 형편을 생각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의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얼마나 비참한 형국인가? 그는 혼자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역을 했건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고, 자신의 생명을 더 이상 지켜주시지도 못하시는 분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도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집중하게 되자,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위해 하는 모든 사역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것입다. 그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아무도 없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광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늘도 별로 없는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자신의 비참하고 억울한 사연을 토로하며 감히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 도망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죽음이 아닌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이젠 됐습니다.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십시오. 나도 내 열조들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해 살고 사역을 감당해도 어느 것 하나도 변화시킬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형편없고 쓸모없는 자가 바로 저라는 것을 주께서 아실 터이니 그저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부르짖다가 쓰러져 울고, 또 울다가 죽여 달라고 부르짖고, 또 그렇게 울다 지쳐 부르짖다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히 죽기를 간구하며 자기 멋대로 소리쳐 울부짖는 엘리야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세우기 위해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셨고, 따끔한 훈계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울다 지쳐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부드럽게 다가와 그를 어루만지고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여 주시면서 숯불에 구운 떡과 그가 마실 물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살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애처롭게 엘리야를 바라보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같이 마음 아파하시고, 그를 어루만지시며, 그가 기운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지켜주셨습니다. 그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며, 그가 있는 곳에서 그를 위로하시고 안쓰러워하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엘리야를 괘씸히 여기시기보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의 고통과 아픔에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원망과 절망으로 인한 자기 아픔보다 엘리야의 아픔을 먼저 마음으로 품고 계셨고, 그의 상한 심령에 완전히 자신을 동일시 시키셨던 것입니다. 다행히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떡과 물을 먹고 얻은 힘과 에너지로 40일 동안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 산에 이르렀습니다. 호렙 산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가 그 곳으로 간 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곳이 오직 하나님 품밖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도망간 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갈 곳은 오직 하나님 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원망과 한탄이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호렙 산에 이르러 다시 그 곳에 있는 굴에 들어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찾으시며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서 있어야 할 자리,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은 굴속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남아있었고, 그는 다시 일어나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19장 10절에서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헸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었다고 그들을 향해 불평하는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쏟아내는 원망과 불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시고 살리시는데 목적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19장 11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고 여전히 굴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징조들이 일어났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있어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쉈습니다. 그 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렵고 경외할만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엘리야는 굴 어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19:11)강한 바람이 있어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굴 어귀로 이끌어 서게 한 것은 바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엘리야는 마침내 굴에서 나와 하나님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왔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숨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말없이 그를 뒤쫓아 가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는 엘리야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떠나 자신을 감히 등지고 숨어 있는 굴속의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가슴 아픈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애끓는 심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아비의 절규와도 같이 하나님은 그렇게, 그렇게 그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얼마나 특별한 마음으로 열심을 내었는지 당신은 아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주는 자는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모든 동역자들은 다 죽었고 이제 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생명도 위태롭습니다.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 해왔지만 어느 누구도 당신을 위해 일했던 나의 열심과 헌신을 알아주는 자도 없고 당신조차도 그 위기 속에서 나를 건지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위한 열심과 헌신의 결과는 단지 참담한 죽음뿐이지 않습니까?"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되어 있는 엘리야,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과 뜻을 결코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우울한 세계에 몰입되어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심장을 파고 들어오는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엘리야를 찾으시는 부드러운 음성, 여전히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세미한 속삭임, 그리고 그 세미한 음성이 들려올 때 엘리야의 마음을 두껍고 싸고 있던 단단한 마음의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그를 깊고 어두운 깊은 동굴에서 끌어내어 주셨고 그에게 남겨진 사명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도록 그를 일으켰습니다.
나도 때로 엘리야처럼 깊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으나 사역의 열매도 없고, 어느 누구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되고 비웃음거리가 될 때, 나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져 바닥으로 꺼져버렸을 때, 나는 깊은 우울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나를 숨기곤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피멍이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감히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나는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하나님께 비탄 섞인 자기연민의 마음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떠나시지 않고, 나의 곁에서 머리를 쓸어내리시고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내 곁을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히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향해 감히 쓴 소리를 뱉어내고, 하나님을 향해 감히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소리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넓은 마음은 언제나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안쓰러워하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서 꼭꼭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찾아내시고 나를 뒤쫓아 오시며 , 외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나를 부르며, 그렇게 애처롭게 나를 따라 나서십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세미한 사랑의 음성으로 서서히 나를 동굴 밖으로 이끌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우울의 동굴에서 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외면적인 기적이나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획기적이고 엄청난 상황의 변화나 반전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환경의 급진적인 변화나 상황의 급속한 진전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그분의 조용한 속삭임, 여전히 너를 내 품에 안고 싶다는 그분의 부드러운 초청, 그리고 여전히 나를 찾고 있다는 그분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나를 우울의 깊은 동굴 속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깊은 우울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꾸짖기보다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들을 판단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우리를 돌보신 것처럼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깊은 우울의 동굴에서 끌어내시는 것처럼 그들에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속삭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떠한 모습이든지, 당신이 어떤 일을 했든지,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지친 마음과 몸을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시며 당신이 회복될 수 있도록 당신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오직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속삭임만이 깊은 우울감에 빠진 우리와 그들을 밝은 빛의 세계로 이끌어 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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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9: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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