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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루실 때(요한복음 8:1-11)

https://youtu.be/j_2f2JitF4A

 

 

제목 :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루실 때

본문 : 요한복음 8:1-11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이상을 느끼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기꺼이 불편하고 지루할 수 있는 많은 검사를 거쳐 자신의 몸에 병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검사를 한 후 다행히 정확한 진단이 나오게 되면 그것처럼 반가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두려운 마음도 있겠지만 적절한 치료과정을 통해 병을 고치고 회복에 이를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분명 몸에 이상적인 증후가 나타나는데 아무리 검사를 해도 이상이 없다고 할 때입니다. 진단이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치료를 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정말 난감해 집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몸에 이상적 징후들이 분명이 나타남에도 불구할 때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중 어떤 분들은 많은 징후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느끼면서도 자신은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속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엄청난 진단 결과가 나올까봐 지레 겁을 먹고 그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 병원을 가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결국 호미로 막을 일들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은 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물론 건강하다면야 병원이 필요 없고 의사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지 않으면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도 없고,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지도 그 방법도 알 수 없습니다. 간혹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병도 많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몸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몸의 병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 치료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 이것은 바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내리신 진단입니다. 정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고, 예수님의 구원과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자들은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뿐이었습니다. 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병든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스스로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죄를 용서받고 병을 고침받기 위해 구원자를 찾을 필요도 치료자인 의원을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는 사람들이고, 의원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예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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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걸린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 정죄하며,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시험해 음모에서 빠뜨리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놀랍게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나온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죄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사람들로부터 죽어 마땅하다는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스스로 얼마나 수치스럽고 창피했을까요? 얼마나 숨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스스로 비관하며 고통스러워했을까요? 자신의 죄가 온천 하에 드러났으니 앞으로 자신을 더러운 여인으로 취급할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끔직한 일이 되겠으며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에 휩싸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함께 말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쳐지면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성전으로 나아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밤을 피하고, 추위를 피하고, 쉼을 얻기 위해 돌아갈 집이 있었던 사람들과 다르게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고 기도로 교제를 하시고 다시 성전으로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성전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가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무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갈급함이 있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음모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때로 예수님도 피곤하고 고단한 갈등이 있었던 성전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님의 뜻대로 무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려는 열심 때문에 항상 성전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에겐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였고, 자신의 이익보다 무리들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미워하고, 나를 거절하고, 나를 죽이려하고, 끊임없는 모함과 음모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그렇다 하고, 나를 기다리고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으로 예수님은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고 늘 그러했듯이 그 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첫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요한복음 83-6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조건을 얻고자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돌로 치라 말씀하신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형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던 로마의 법을 어기에 되기에 예수님을 로마 정권에 고소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고,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되기에 유대인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여 고발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악한 의도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장소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그 여인의 죄목을 만천하에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당하게 될 수치와 상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여인은 단지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자신들의 음모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며 도구에 불과했고, 회복 불가능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거룩함의 옷을 입고 있는 듯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죄인을 향한 어떤 긍휼함이나 자비함도 없는 매몰찬 냉혹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날까롭게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악함과 죄를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도 못하면서 여전히 악을 행하는 자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과 악함에 종노릇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 칭하는 자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정죄하고 비난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깨닫지도 못하고 무감각하여 인정하지도 않는 자들, 그들은 적어도 겉으로만은 의로워 보이지만, 그 마음속은 새까만 죄와 허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죄를 다루실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본문 말씀 요한복음 86절 하반절부터 9절까지 보면 “(8:6)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성전 앞에는, 자신을 고발하려는 조건을 얻으려고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끌고 와서 죽어 마땅한 죄인 취급하며 살기등등해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땅에 무어라 쓰셨든지 그들은 상관없이 계속 예수님께 질문을 해댔습니다. “이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고. 그러자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은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해 있던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죽어 마땅한 죄인 취급하며 자신들은 적어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아우성대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너희 중에는 이 여인을 돌로 치기에 합당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선고를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곳에 서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던 그들의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이나 죄악 된 나쁜 행동을 깨달아 느끼고 책임감을 갖고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곳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던 사람들,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땅에 무엇이라 쓰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정죄하던 사람들,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는 악함을 죄라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드러난 죄만 정죄하고 비난하기에 급급했던 사람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비밀하게 지었던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예수님은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게 되고 보게 되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자 그들은 더 이상 간음한 여인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하거나 그녀를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소리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게 되자 그들은 그 비난의 화살을 더 이상 다른 이에게 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시는 예수님 앞에 더 이상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죄를 드러내심으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베풀어주십니다. 자신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해 있는 사람들은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보게 하시는데 이것이 진정한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시고 그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밧세바와 간음한 죄악을 감춰주지 않으시고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케 하는 죄악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많은 일들 중에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직면하게 하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바탕은 사실상 1903년과 1904년 초에 걸쳐 일어난 원산 부흥 운동이었으며, 그 주역이 로버트 하디 선교사였습니다. 하디선교사는 캐나다 출생으로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1890년 아내 켈리와 한국에 와서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가 189211월 원산에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1898년 캐나다 대학 선교회와의 계약기간을 끝내고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남아 계속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1900년경 함경도 원산에서 선교와 의료 활동을 했는데 의료 활동도 신통치 않았고 선교 활동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당시 하디 선교사는 강원도 북쪽에서 몇 해 동안 애써 일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해 큰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을 한낱 미개하고 무지한 백성들로 생각했습니다. 3년 이상의 헌신적인 사역에도 불구하고 성도도 없고, 사역의 열매가 없는 것 역시 가난하고 무식한 조선 사람들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는 환자들을 기피하는 권위적이고 엄격하고 쌀쌀맞은 의사였고, 선교사였음에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조선 사람들을 정죄하기에만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원산에서 열린 작은 기도모임을 준비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성령의 첫 번째 요구는 교인들 앞에서 내 과거의 실패와 그 원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라고.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수치와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자신의 교만, 강퍅한 마음, 신앙 결핍,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죄악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디의 마음에는 놀라운 평화가 임했고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의 하디의 삶은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이전의 하디가 아니었습니다. 하디에 의해 시작된 회개이 고백이 널리 퍼져서 1907년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려움으로 몸을 떨며 몸과 마음의 고뇌 속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직면하자 그들은 통곡하면서 주여! 주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계층과 연령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와 동시에 생활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회개한 술주정뱅이가 술병을 깨고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하는가 하면, 도박꾼은 화투를 찢어버리고 성경공부에 열중했으며,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손을 붙잡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훔친 남의 물건이나 돈은 다 먼저 임자에게 돌려주고 용서를 빌었고 친구, 친척집을 돌아다니면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마음의 변화와 기쁨에 대하여 간증하고 전도하는 일이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산 해변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이 이와 같은 회개의 과정을 거쳐서 전국을 휩쓸게 되기까지는 평양의 대부흥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길선주 장로의 죄의 고백과 회개 역시 평양대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민감하게 알고 회개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사역의 실패와 열매 없음의 이유를 조선 사람들에게 덥어씌우던 하디는 비로소 자신의 죄를 보고 회개함으로 엄청난 대부흥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 예수님 앞에서 정죄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직면하게 하신 것은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 주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가난한 마음,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며 중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시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두 번째, 간음하다가 현잡에서 잡혀온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89절 하반절 부터 11절까지 말씀을 보면 이 여인에 대해 그리고 이 여인의 죄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8:9)~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음행하다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인은 자신의 더러운 죄악을 감추려 해도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죄악을 행한 자리와 죄악을 행하는 여인의 추악한 모습은 만천하에 공개되어졌고, 모든 사람들은 이 여인을 향해 정죄하고 멸시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아닌 천개라도 만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변명이나 합리화도 그 여인의 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아니 누가보아도 죽어 마땅한 죄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숨겨진 죄가 드러난 사람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조용히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그들은 또 의인인체 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동일한 죄를 지으면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숨길 수도, 죄인이라는 자신의 낙인을 감출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녀를 정죄하던 모든 사람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여인을 정죄하던 자들도 이 여인과 동일한 죄인이었음을 여인에게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이 여인의 마음에 못 박듯이 행한 정죄에 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정죄는 다 부질 없는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던 그들도 동일한 죄를 행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죄인을 정죄해봤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죄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죄인들이 죄인에게 행하는 무의미한 정죄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며 죄인들의 죄를 정죄하실 수 있고, 또한 그 죄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진정한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그 분이야말로 이 여인의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을 언도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가 없으신 심판자 되신 예수님께서 죄로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 살 소망이 없는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죄를 행하지 않더라도 숨어서 죄를 행하고,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악의를 가득 채웠던 진정한 죄인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한낱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정죄하기에 바빴고 회복 불가능한 존재로 여겼지만, 죄가 없으신 진정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죄로 인해 만신창이 되고 깨어지고 쪼개어진 상한 마음으로 고통 받는 이 여인을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구원의 존재로 바라보셨고 회복 가능한 존재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 여인과 같이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온 세상에 드러난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심과 상처로 뒤범벅된 사람,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비난과 멸시와 거절의 대상의 된 사람,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심과 좌절의 중심에 있는 사람 그런 분은 없습니까? 이와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죄의 늪에서 빠져 나올 길은 없다고 절망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앞이 보이지 않고 깨어진 심령으로 살아가는 분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십시오. 오늘 예수님은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이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회복 불가능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정죄하셨다면 우리에게 어떤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진정한 심판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소망 없는 죄인으로 낙인찍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갖고 참된 회복과 자유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결코 죄를 가벼이 여기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고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와 구원의 길이 열려져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면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더욱 책임감 있게 죄를 제거하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더 큰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셋째,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은밀히 죄를 행하고도 거룩한 척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바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또한 죄를 짓다가 발각되어 붙잡혀 온 간음한 여인과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속아 거짓된 자기 의에 빠져 죽든지 아니면 만천하에 공개된 죄에 대한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고, 자기 죄를 직면하게 하셔서 회개로 이끄시는 분이 계십니다. 죄로 만신창이 되어 고통에 신음하는 우리를 품고 담대히 용서를 선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동일한 죄인들이지만 그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죄를 행하였는가? 아니면 죄가 공개되어 만천하에 드러났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죄가 숨겨져 있는가? 드러났는가? 만 다를 뿐, 그들 모두는 동일한 죄를 행하고 있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물론 죄를 드러나고 공개된 정도가 그들의 결백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 없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면 사람들에겐 숨길 수 있어도 감히 모든 곳에 존재하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죄가 모두에겐 있고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권세를 얻기 위해, 자신의 실패를 교묘히 숨기고 남을 탓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그들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낙인찍고, 예수님 앞에 끌고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공개된 죄에 집중하여 자신의 감추어진 죄와 구원이 필요한 죄인됨을 망각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쉽게 낙인찍으며 또한 들을 정죄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판단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같은 죄인에 불과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죄 없으신 진정한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반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처럼 자신이 진정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 그리고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입니다. 어떤 추악하고 더러운 죄도 기꺼이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죄와 수치심과 절망과 상처로 죽을 것 같은 우리는 다시 치유되고 힘을 얻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어떤 죄일지라도 주님 앞에 드러났다면, 죄의 고백으로 나아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용서 안에서 참된 거룩함의 옷을 입게 됩니다. 죄인에게 주시는 이 놀라운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루실 때의 어떻게 하시는지 그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스스로 의로운 체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드러내심으로 회개로 나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로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이 없는 자, 죄로 인해 수치감과 낙심에 빠져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심으로 그들이 다시 거룩한 삶을 회복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주님, 또한 우리가 죄의 무게로 도저히 하나님 앞에 또는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릴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매 순간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