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있기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홍수와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가 그 앞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비가 올 것을 예비하여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며 멸시했습니다. 헛된 일을 하고 있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방주를 완성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물들은 모두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은 닫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사람과 생물들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방주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깊은 샘은 터져 물을 쏟아냈고 하늘의 문은 열려 엄청난 홍수를 쏟아 부었습니다. 방주는 흔들렸고 둥둥 떠올랐습니다. 방주 안에 갇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답답하고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어두운 시간을 지나야 했을 것입니다. 방주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물에 쓸려 죽어가면서 엄청난 부르짖음으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생물이 죽을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록 홍수는 40일 만에 그쳤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언제 이 곳에서 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고, 바람을 불어 물을 줄어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8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셨습니다.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가족 뿐 아니라 들질승과 가축들까지도..믿음의 사람들 역시 답답한 시간을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잊혀 진바 된 것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순간, 우리의 모든 감정, 답답함과 두려움까지 모든 것을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셔서 물을 줄어들게 하셨고, 물을 뿜어내던 깊음의 샘과 홍수를 쏟아 붓던 하늘의 창문을 닫게 하시고 비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기까지 기다린 시간은 오랜 시간 후였습니다. 그리고 8장 15~16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나 삶의 문제가 빨리 끝나고 해결되길 원합니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조바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마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노아는 보이는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그 시간을 기다리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8장 20-21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노아의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세상을 심판하시고 모든 생물을 멸하신 것과 같은 일을 다시는 행하시지 않을 것을 결심하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오롯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시간을 견디고 인내한 자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감동하십니다. 그 한 사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자를 저주가 아닌 축복의 대상으로 바꾸십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무엇이 보였을까요? 저는 가끔 이 본문을 읽을 때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물론 홍 수 이후에 오랜 시간동안 물이 줄어들어야 했고, 그 시간동안 홍수로 인해 죽었던 모든 시체들은 보이지 않았을 수 도 있습니다. 물에 쓸려갔든지 아니면 이미 흙으로 돌아간 후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시체들이 곳곳에 쌓여 있고 널부러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상상해 보건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느끼는 그 마음의 두려움은 엄청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 광활하고 황폐한 땅,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는 그 땅에 눈에 보이는 사람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홍수로 세상은 심판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아마 비만 내려도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을 졸였을 것 같습니다. 또 홍수가 내려서 우리를 죽이면 어떻게 하나? 라는 염려가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창세기 9:9~19절을 보면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9: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9: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9: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9: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그렇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비가 내릴 때마다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이 됩니다. 비 소리만 들려도, 하늘만 먹구름으로 어두워져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요? 그 때마다 그들이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과 하나님이 그 약조의 증표로 만드신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그들은 기억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우리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보호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안한 심령과 두려운 감정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 후 노아와 그의 자손들이 태어나고 번성합니다. 홍수 이후에 많은 자손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창세기 11:1-4절을 보면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땅에 언어가 하나고..말이 하나였을 때 그들은 동방으로 옮겨 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거기 거류하였습니다. 그 땅은 함의 자손 중 힘과 기술을 가진 용감한 사냥꾼 니므롯이 자기 나라를 시작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 모여 서로 말하기를 돌 대신 벽돌로 진흙 대신...(당시 방수 재료로 사용된) 역청을 사용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계획합니다. 이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요? 저는 아마도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아픈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홍수의 심판이 얼마나 처참하고 참혹한 것이었는지 들었고 알았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아팠는지,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공포였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홍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습니다. 아무리 비가 와도 그 비로 잠기지 않을 만큼 높은 탑이야말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증표인 하늘에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고 그 약속을 기억해야 했을 터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당시 방수재료로 사용된 역청을 그 탑을 보호하는 방수재로 사용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는 돈으로 인해 동일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모아두고 쌓아둡니다. 돈으로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이나 자신이나 자녀들이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 큰 어려움을 당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건강을 잃어버려 동일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자 지나치게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공부를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마음의 고통을 느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녀를 위험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고통과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얻고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안전하게 되고 더 철저히 보호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도구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스스로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의 수준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무언가를 집착하게 하고, 쌓아두게 하고 모으게 하고 잡게 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아지고 더 쌓아두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과 평안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1:5-9절을 보면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1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을 보러 내려오셨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그 도시를건설하는 일을 그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 그 분의 말씀을 믿지 못해 우리의 방법과 수단과 지혜로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탑을 쌓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시고 그 일을 멈추게 하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보호하시는 분임을 철저히 배우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가 무엇을 얻고 쌓아올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없어도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약속을 믿을 때 찾아옵니다.
11월 17일부터 저에게는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1월 17일 친정 어머니가 외래로 순천향 병원에 호흡기내과를 가시는 날이었습니다. 원래 오빠가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로 했는데,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아서 저희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에 가시기 며칠 전부터 너무 힘들어 하셨는데, 마침 담당 의사 선생님이 입원을 하라고 말씀하셔서 다음 날 입원 할 것을 예약하고 코로나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치시고, 근래 들어 몸이 갑자기 쇠약해지셔서 오고 간 곳이라고는 병원 뿐 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렸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음 날 입원을 예약하고 어머니를 부천 집으로 모셔다 드릴까 하다가 어차피 다음 날 입원하시니까 제가 좀 더 돌봐드리고 싶은 마음에 저희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전화를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는데 pcr검사가 음성이면 문자가 와야 하는데 문자가 아니라 전화가 몇 통이 걸려왔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양성이라는 결과를 알게 되었고, 코로나 전담병원 병상이 날 때까지 어머니를 다시 부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저희 집에 그냥 모셔야 하는지 결정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부천 집으로 모셔다 드리자니 돌봐줄 사람이 없고, 저희 집에 모시자니 교회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코로나 이후 워낙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졌는데, 혹시 어머니를 돌보다가 교회에 어려움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를 제가 돌봐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아, 목사님을 시댁으로 보내고,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신 6일 동안 저는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에서 얼마나 쉽게 요동하고 흔들리는 존재인지,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의 따스한 위로 한마디에 얼마나 깊은 감격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힘들었는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코로나는 맛을 잃게 하여 엄마로 하여금 식사를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웬만하면 아프셔도 드시는 것만큼은 챙기시던 분이었는데, 식사를 드시라고 권면하고 강권할 때마다 어머니를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렇게 식사 끼니때마다 엄마와 저는 실랑이를 하고 엄마가 잠시라도 앉거나 머무는 곳에서는 소독을 하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엄마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억지로 하루에 한 끼씩 드시긴 했지만 정말 마지못해서 억지로 식사를 드셨습니다. 천식이 워낙 있으셔서 호흡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언니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보건소와 질병본부와 보건복지부까지 전화를 하면서 병상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하겠지만 어머니가 병원으로 들어가시는 날 119 수송하시는 분이 말씀하시길 “지금이라도 병상이 배정되어 다행입니다. 위중증환자 800명이 지금 대기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워낙 신장이 좋지 않아서 10월에 병원에 입원하셔서 간신히 투석을 받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어 나오셨는데, 제가 돌보는 기간 어머니는 점점 기력을 잃어가셨고,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1) 처음에 가진 생각은 어머니의 코로나가 나에게 전염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목사님도 위험하고 교회에도 어려움이 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마음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은숙아 너가 만약 코로나가 확진되었다고 치자. 그래도 내가 여전히 너의 삶을 선함으로 다스리고 있음을 믿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항상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코로나가 확진되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하나님이 선하지 않으시고, 내가 안 걸리면 선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내게 주어진 상황과 어려움에 상관없이 항상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2) 두 번째 드는 생각은 엄마가 코로나로 인해 신장이 더 나빠져서 신장투석을 하게 되면 안 되는데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식사를 못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며 칠 동안 신장약도 드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힘든 몸을 가지고도 소변을 보시기 위해 새벽에 10번이라도 일어나시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또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은숙아 만약 너희 엄마가 신장투석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선하게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있음을 믿을 수 있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습니다. 신장투석을 해서 더 좋아질 수도 있었습니다. 더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선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은 내려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당신은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3) 그러나 가장 큰 마음의 짐은 교회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혹시 폐쇄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두려움을 여지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은숙아 만약 그렇게 될지라도 여전히 내가 선하고, 여전히 내가 이 모든 것을 선하게 다스리고 있음을 믿니?”라고 물으셨습니다. 마침내 저는 제 마음으로 붙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선하신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내게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하나님 당신은 선하십니다. 당신은 선함으로 이 땅을, 이 상황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셔서 마침내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상황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평안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려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고,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바벨탑을 쌓고, 마음의 벽을 쌓아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탑은, 그 벽은 쌓아 올려 질수록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무겁게 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 탑을 쌓아 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것들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 모든 것을 멈추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품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임을 알게 하십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의 그림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제가 황무한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이제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면 나는 여기서 너무 고통스러워질 텐데. 나뭇가지라도 돌들이라도 주워서 나를 보호할 벽이라도 쌓아야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런데 제가 상상했던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곧 불어 닥칠 바람은 나를 에이고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바람은 오히려 나를 따스하게 감싸고 나의 몸을 녹이는 따듯한 훈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으려고 많은 바벨탑을 쌓아올리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 분의 약속을 믿고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모든 헛된 수고를 멈추라고 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고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할 때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것에서 지키시는 유일한 분임을 기억하시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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