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후난투데이’는 “식물인간 중이던 남편, 4년 만에 깨어나 기억나는 건 오직 아내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2016년 4월 중앙선을 침범한 버스와 부딪히면서 심각한 뇌 손상으로 1급 지체장애인이 되었던 황 모 씨와 그의 아내 리 씨의 사연이었습니다. 당시 황 씨의 나이는 39세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그는 후난성 한방재활병원에 입원해 연명치료를 지속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식물인간 상태로 무려 4년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리 씨는 황 씨가 사고로 의식을 잃은 날,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누운 병상 옆에 간이침대를 놓고 24시간 밀착 간호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딸 양육은 친정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내 리씨는 의식이 없는 남편에게 매일 아침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둘이 평소 즐겨 들었던 음악을 들려주고,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를 읽어주는 등 남편의 의식 회복을 위한 간호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황 씨에 대한 연명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비싼 병원비와 호전되지 않는 황씨의 상태로 인해 가족들과 지인들은 줄곧 남편의 치료를 중단하라고 아내인 리씨에게 종용해왔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황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마음마저 힘들었지만 리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 딸에게 아버지를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4월 남편 황 씨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이날도 평소처럼 황 씨 곁을 지키고 있던 리 씨는 남편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시작으로 황 씨의 건강은 점차 회복됐다. 하지만 의식을 되찾은 남편은 아내 리 씨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황 씨가 기억하는 것은 리 씨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과 아내의 목소리 단 두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특히 황 씨는 자신과 아내 모두 18세에 머물러 있는 듯 행동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어느덧 43세였다. 황 씨는 이후에도 1년 동안 오직 아내와 자신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행동했는데, 식물인간이 된지 5년 만에 점차 나아져 아내와 주변 지인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교통사고 직후 의식도 없이 코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영양죽으로 연명했던 황 씨가 아내의 지극한 간호를 통해 휠체어를 타고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는 의료진과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내 리 씨를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는데 그 노래 가사에는 ‘1만 년 동안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퇴원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어떻게 그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아내 리씨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고 간호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남편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면 수 십 개, 아니 수 백 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변명이나 합리화도 통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내 리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끝까지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간호하고 마침내 남편의 회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도 쉽지 않은 길입니다. 멈추지 않고 이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믿음의 길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에 그려진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이 무어라 말해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감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의 기적을 본 야이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셨던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야이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결어가는 결단을 하기 원합니다.
첫째, 기도를 통해서만 믿음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삶의 모든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특권을 누리게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사랑하는 어린 딸의 죽음과의 대면이었습니다. 그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야이로는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엎드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딸이 죽어가는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가시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을 자리에서 일으키는 동기가 됩니다. “주님 밖에서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는 간절하고 겸손한 간구에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실 수밖에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결국 그의 간구는 그에게 가장 힘든 삶의 문제인 죽어가는 자신의 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고통의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특권을 누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지혜로 우리 방법으로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이 아니라도 의지할만한 무언가가 있고,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망을 잃어버릴 만큼 절박한 문제와 고통에 아직 서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직 자신의 절망적인 무능함과 연약함의 한계를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병원에 가서 보면, 우리는 가끔 의사를 붙들고 끊임없이 애걸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습니까? 환자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환자가 살아날 소망이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에 있는 사람일수록, 의사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고, 다른 어떤 방법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무능력함과 연약함을 절감하는 사람일수록 의사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의사에게 애걸하며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했을 때, 그는 결코 혼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보폭에 맞추어 그분과 동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기 전에, 참된 능력의 근원되시며 구원자 되신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야이로의 곁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셨고, 예수님은 그와 동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통로와 같습니다. 혼자 걷는 길은 ᄈᆞᆯ리 갈 수 있지만 둘이 가는 길은 더디더라도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응답하셨고, 그와 함께 죽어가고 있는 딸이 누워있는 곳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집으로 걸어가면서 죽어가는 어린 딸이 이제 예수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치유될 것이라는 작은 소망의 불꽃을 마음에 피우면서 설레고 기뻐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될 수 있으면 예수님께서 걸음을 재촉하셔서 빨리 집에 가서 딸을 고쳐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천천히 그리고 너무나도 더디 움직이시고 계셨습니다. 하필 그 길에서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치유 받았던 터라 딸을 향한 그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야이로의 바람처럼 그렇게 빠르고 민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고 치유받은 여인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고, 계속적으로 군중 속에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는 길을 지체하시는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고 멈추게 하는 군중들과 혈루증에서 치유 받은 여인에게 다소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을 기다렸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가는 딸을 치유하는 길로 계속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우리가 걷는 길에서 함께 걸으시며, 우리와 동행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우리의 지혜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그 삶의 고통과 문제의 핵심 속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과정 속으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물론 보이는 상황은 여전히 절망을 이야기 하고, 기도의 수고가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멈추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때로는 우리에게 낙심을 가져다 줄 때도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너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아 실망하게 되고, 우리의 원함은 거절된 것 같고, 우리의 수고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우리가 기대하던 시간에 그 분은 아무런 역사를 드러내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수고를, 믿음의 수고를,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을 때, 그에게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을 때, 야이로는 그 전까지 가져보지 못한 엄청난 은혜를 입게 됩니다. 보이는 상황은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그의 어린 딸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을 때,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2) 상황이나 사람의 소리보다 주님의 음성을 더 크게 들어야만 믿음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님은 지체하셨고 야이로의 원함대로 빠르게 움직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야이로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기다렸고 그의 곁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때로 우리도 우리가 생각한 가장 적절한 때에 예수님이 반응하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저버리신 것도 아니고, 우리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저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해 그 분의 향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정금과 같이 빚어지도록 연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야이로와 함께 죽어가는 딸을 고치러 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은 혈루증에서 치유 받은 여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는 소식을 들려줍니다. 이는 야이로에게 그야말로 청전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누구는 치유를 받는데, 자신의 딸은 죽었다는, 누구는 건강해 졌는데, 자신의 딸은 살아날 수 없다는, 누구는 문제 해결을 받고, 소망을 꿈꾸게 되었는데, 자신의 딸에게는 죽음이 선포되었음을 마주한 순간, 아마도 야이로의 마음은 산산조각 깨어지고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본다면, 육신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 듣는다면, 그는 낙심과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모든 것을 놓아버릴 만한 충분한 순간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한 결 같이 절망을 이야기 했습니다. 딸의 죽음과 함께 모든 소망은 끝났다고, 야이로가 딸을 살리기 위해, 믿음으로 붙잡았던 마지막 소망이었던 예수님도, 그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에게도 불가능하다고....그에게 달려온 사람들 뿐 아니라 그의 눈과 귀로 마주한 모든 상황과 환경이 그에게 절망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야이로의 귓가에 들려오는 또 다른 세미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주고, 두려움 가운데서 견고한 믿음을 주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야이로는 사람들이 절망을 선포할 때, 그 소리를 듣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시고 죽은 딸이 있는 집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간구도 헛되고, 수고도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도 그는 상황이나 사람의 소리보다 예수님의 음성을 더 크게 들었고 예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야이로와 같이 절망의 울부짖음 한복판에서 한 가닥 소망을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모두가 절망을 이야기하며 끝이라고 말할 때, 야이로가 들었던 바로 그 음성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은 절망을 이야기 하는데, 유일하게 소망을 이야기 하는 분,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유일하게 생명을 이야기 하는 분, 모두가 불가능을 이야기 하는데, 유일하게 가능을 이야기 하는 분,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우리는 멈추지 않고 믿음의 길을 계속 전진해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성도님의 삶속에도 분명히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깊은 평안을 경험했던 순간, 모두가 절망을 이야기 할 때 왠지 모를 소망의 불꽃이 가슴을 불태우던 순간,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주님께 기도하니 오히려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던 순간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무엇을 이야기 한든, 세상의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든 우리는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그 무엇보다 더 크게 듣고 반응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어야 우리는 끝까지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3) 보이는 상황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믿음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가슴이 무너지고, 다리가 떨려 어떻게 집에 이르렀는지도 몰랐을 회당장 야이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음성을 의지해 딸이 죽어있는 그 절망의 한복판으로 예수님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곳, 회당장의 집에는 떠드는 소리, 울며 심히 통곡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곳에, 오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 덕분에, 야이로의 집에는 절망을 함께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육신의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만 바라볼 뿐, 영의 눈을 열어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곳은 이미 혼돈과 통곡이 있는 절망과 슬픔의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곳,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의 사람들은 이런 절망과 슬픔의 삶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다고 여기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참담한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엔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은 것처럼 보여졌으나, 믿음의 눈으로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 야이로의 어린 딸은 죽은 것이 아닌 단지 자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절망을 이야기하는데도 소망을 이야기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비웃음은 빈정거리거나 업신여기는 태도로 웃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그들의 건방진 태도는 예수에 대한 무지 때문이며, 눈에 보이는 상황을 예수 보다 더 신뢰했기 때문에 나온 불신과 불손의 태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자기와 함께 한 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아기가 죽어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죽음의 한복판, 어떤 사람도 다시 나올 수 없는 절망의 절정 그 곳에 예수님과 예수를 알고 끝까지 신뢰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그러자 소녀는 일어나 걸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일, 예수에 대해 무지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과 사람의 제한된 경험을 예수의 말씀보다 더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있었으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의 말씀을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는 초대되었던 그 기적의 자리,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그 기적,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기적에 믿었던 그들은 함께 있었고 함께 보았고 함께 놀라워했습니다. 죽음의 애통이 있는 곳에서 생명의 기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육신의 관점에서 보이는 상황이 전부였고, 육신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다른 것을 봅니다. 바로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든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분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모두가 죽음을 선포하고 극한 절망을 외치며 울부짖는 곳에서 오히려 생명을 선포하시고, 소망과 기쁨을 선물해 주십니다.
결국, 야이로는 육신의 눈으로 보고 감각적인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을 넘어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소리를 넘어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예수님이 보시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그렇게 끝까지 믿음의 수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가 그토록 간절히 간구했던 대로 죽은 어린 딸의 생명을 다시 얻게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말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실제인 것처럼 그렇게 믿고 있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육신의 죽음 속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보고 있으며, 극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고 붙잡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이미 성취되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궁극적인 실체임을 알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수고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실상이 되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이로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믿음의 길을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은혜를 누릴 때, 그리고 사람이나 상황의 소리보다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더 크게 듣고 반응할 때,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상황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이고 실상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들어와 함께 동행하기를 시작하시는 예수님, 사람보다 어떤 상황보다 세밀하게 말씀하시지만 우리 안에 참된 담대한 믿음을 주시는 예수님, 지금도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곧 실제가 되어 우리 앞에 기적을 펼쳐 보이시는 예수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바로 그 분을...우리의 삶에서 매 순간 만나고 경험하는 될 것입니다. 그 벅찬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막 5:21~43)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5: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5: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5: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5: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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