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계신, 지금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에 동참하고 계신 성도님들 역시 매 순간 시험을 치루고 있습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치러야 하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매 순간 치러야 하는 시험입니다.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정답이 매겨지는 시험입니다. 많은 분들은 시험을 치며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불잡고, 시험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삶에서 이루어 가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아쉽게도 매 순간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살아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참 싫어하는데 성도님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받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를 혼동시키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한국어 성경으로 보면 이것저것 모두가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으로 이 말씀을 읽으면 좀 더 그 뜻이 명백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크게 3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험(Test)’입니다. 우리가 치루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통해 우리 믿음의 수준과 정도를 확인받게 됩니다. 이 시험의 주관자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과 상관없이 언제나 온전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꺼이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을 거쳐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견고함의 정도를 증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해 보시기 위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이삭을 받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의 믿음과 마음을 시험하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시면서 그들이 그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위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말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을 공급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만나를 거두지 못한 체 하나님께서 금하신 헛된 노력을 통해 그들의 불신만을 증명해 보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시험에서 낙방했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시험(Test)은 우리의 믿음의 정도와 수준을 증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말 그대로의 시험을 의미합니다.
[창22: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16:4]"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그리고 두 번째는 ‘시험(Trial, Sufferings)’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시험 중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환난을 만나면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우리에게 허락되는 시련과 훈련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시험이 의미하는 시련과 환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인내와 연단과 소망 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환난과 고통과 시련 중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이 인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신뢰하는 믿음의 기초위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죄인 된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연단의 과정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지켜줍니다. 이 인내의 성품이 강건하게 되면 이 인내는 마치 합금이 뜨거운 불속에서 자신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금으로 순결하게 변화되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성품을 제거하는 연단의 과정에서 굳세게 견딜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그대로 투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연단의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한 소망을 붙잡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Trials)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목적은 우리에게 재앙이나 멸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요. 진정한 장래와 소망과 비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험(Tria)에 부딪히면 기뻐해야 합니다.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에는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약1:2~4]"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유혹 또는 미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험은 우리를 파괴시키고,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넘어뜨리기 위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유혹한다고 해도 그 유혹에 넘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미혹되고 유혹되어 넘어지는 동기가 되는 것은 거의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사기꾼들이 극성을 부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기꾼들이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해도 그들의 속임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돈을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왜냐면 어떤 사기꾼들의 유혹에도 돈에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의 속임에 흔들리거나 넘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있는 갖가지 욕심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찬 이 욕심에 이끌리고 미혹되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인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사망은 하나님의 목적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케 변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합니다. 우리를 기꺼이 파괴시키고 멸망시키려는 것은 바로 사탄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육신의 정욕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과 갈증이 생길 때마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욕심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상황을 보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만날 때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힘과 공급을 간구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굶주린 육체를 더욱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파멸시키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도구로 우리의 욕심에 집착하게 하여 하나님을 저버리도록 유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험(Test)을 치루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매 순간 우리는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가운데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이 시험을 통해 매 순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Trial, Suffering)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즐거이 받아야 합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믿음 안에서 인내하게 하여 우리를 연단하고 결국 살아있는 소망이 되신 하나님을 붙들도록 도전합니다. 이 시험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온전한 목적을 이루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시험(Temptation)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과 파괴로 이끄시기 위해 어느 누구도 기꺼이 시험하시지 않으시는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사탄의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욕심을 자극하고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죄를 짓고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과 사망으로 우리를 몰아가서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Test)하실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시험(Trial, suffering)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시험(Temptation)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광야에 가시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이끄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지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견고한 믿음을 보여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이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미혹합니다.
춘향전을 아시지요? 춘향이와 이몽룡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은 헤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떠나는 이몽룡은 춘향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다시 와서 부부의 연을 맺겠다고 약속하고 떠납니다. 불행하게도 춘향이가 사는 마을에 변 사또가 부임하게 되고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고 하며 이야기합니다. 춘향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변사또의 요구를 거절하지만 그렇게 거절할수록 그는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온잦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춘향이는 이몽룡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나고 결국 춘향이를 못살게 했던 변사또는 벌을 받고 춘향이와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지요. 춘향이가 이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이 몽룡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고난을 견디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금 이와 비슷한 상황에 계셨던 것입니다. 변사또는 잦은 거짓으로 춘향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양반자제가 뭐하러 오겠냐..너는 한번 가지고 논 것이다. 안온다. 그러지말고 그냥 그를 버리고 나에게 수청을 들고 편하게 살라는 둥..여러분이 만약 춘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예수님 역시 그와 비슷한 환경에 있으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늘로 부터 울려 퍼진 하나님 아버지의 외침이었습니다. 그 후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사탄에게 미혹을 받으심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는 배를 채워 줄 떡 한조각도, 외로움을 달래 줄 단 한 사람도, 추위와 더위로부터 보호해 줄 어떤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온 몸으로 배고픔과 외로움과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홀로 씨름하는 시간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기뻐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그 분의 분명한 외침을 들은 후,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 온 모든 상황과 환경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거절하셨음을 더 크게 외치는 것 같은 그런 절망적인 일들과 마주하는 순간들,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철저하게 꼬여져 있는 문제와 마주하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사십 일이 예수님에게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로 예수님을 미혹했습니다. 사탄의 미혹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고 그 분의 기뻐하심을 받는 아들이 분명하다면, 단언컨대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아들 되신 예수님을 이런 배고픔과 외로움과 비천한 상황에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짓에서 출발하여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하게 하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감각할 수 있는 현실,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었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시험 전략이었습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온 몸의 육체적 감각을 근거로 말한다면 지금 예수님이 처한 상황과 환경은 그 분을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닌 거짓임을 분명이 확증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신뢰하지 말고 이제 하나님과 독립된 예수님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해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스스로의 방법으로 증명해 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이상 신뢰하지도 말고, 붙잡지 말고, 인간의 감각이 말하는 현상이 실상이라 믿고 이제 스스로의 살 길을 스스로 열어보라는 거짓의 미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험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탄의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의 거짓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면 그 선악과를 안 주셨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 선악과를 먹으면 그들이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의심하게 하고 흔들어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탄의 거짓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으로 자신의 생각과 방법에 따라 선악과를 먹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자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과 감각을 따라 사는 삶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니까? 확신반을 할 때 제가 성도님들에게 한명을 전쟁터에 보낸다면 자녀 중에 누구를 보내겠냐고 물어보면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는 보낼 수 없고 자신이 가겠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자녀의 생명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붙잡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확실히 믿을 때만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로마서 8:32~39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라은 결코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주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대로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셔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홀로 시험 당하신다고 여기셨을 때도 결코 그 분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거친 광야에서 그 분을 수종 들도록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로는 감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를 보호하시고, 그가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영적 지원자들을 그에게 붙여주심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2) 그 분이 말씀이 신실하게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실제임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고 감각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 분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보이고 감각되는 현실이 진정한 실상임을 믿고 이제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신뢰할 것인가? 하는, 무엇이 과연 붙잡아야 할 진리인가? 에 대한, 진리와 거짓에 대한 치열한 내적 전쟁이 벌어지게 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행해진 사탄의 시험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면 결코 이런 황폐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그분을 버려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에 대해 예수님은 감각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 자신을 향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붙잡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스스로의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믿음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고 스스로의 영광을 구할 길을 마련하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향해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즉 "하나님이 말씀이 기록된 대로"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성경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명을 의탁할 것임을 선포하심으로 감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실상이며 진리 되심을 선포하심으로 시험을 이기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어지고 있습니까? 감각할 수 있는 현실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크게 들려지고 있습니까? 철저히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감각하고 느껴지는 현실이,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실상이고 진리라고 한결 같이 속삭이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이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는 상황과 환경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진리라는 믿음이 그 분의 가슴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감각을 넘어서 모든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 진정한 실상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믿음, 그것이 예수님이 시험에서 이기신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믿음의 정의입니다. 이 의미는 즉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상을 바라보면서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상황과 환경 감각적인 모든 현실을 넘어서서 영원한 실상,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도, 항상 성취되어지는 궁극적인 실재인 진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 항상 실상이고 진리인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으므로 어떤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현실이 실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실상이며 진리라고 믿고 그것을 바라보며 매 순간을 살아내고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누리는 특권을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누리며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보이는 모든 상황과 감각할 수 있는 모든 현실을 초월하여 진정한 실상이며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전부를 거셨던 것처럼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는 과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우리의 전부를 걸 수 있을까요?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제자의 길을 우리 역시 걸어갈 수 있을까요?
사탄의 거짓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방법으로 해결하라고 미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제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급급해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분의 뜻과 말씀이 무엇인지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더욱 의존적이며 순종적인 자세를 보여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과 혜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거부한 체 스스로를 확장시키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권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며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권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되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더 의존하고 더욱 순종하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설령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방법과 지혜와 능력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에 대해 정 반대의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넘으려 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며 상황과 환경에 빗대어 그 분을 의심하게 하고 불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분의 자녀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전적 순종과 전적 신뢰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판단할 때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대해 혼돈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 분을 순종할 수 있고, 그 분을 경배할 수 있고,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특권은 스스로를 높히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일본 동경에 있는 제국호텔(imperial Hotel)은 미국의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oyd Wright)라는 사람이 건축하였습니다. 그는 호텔의 공사를 맡은 뒤 기초 공사를 하는데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매달렸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비용도 두 배 이상 들어야 했고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자되어야만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초공사에 이렇듯 많은 자원을 쏟아 붓는 그를 향해 낭비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호텔은 기초공사에 2년, 나머지 공사에 2년 걸려 4년 만에 완성되었고, 이 공사는 비용을 무리하게 많이 들여서 지은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호텔이 지어진지 52년이 지난 후 동경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대지진 때에 많은 건물과 도로들이 파손되고 동경시내를 처참하게 파괴했지만 이 호텔만큼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은 채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이름은 일본 건축계의 신화처럼 유명한 이름으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기초가 튼실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답고 높은 건물이라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기초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제국호텔은 시간과 돈을 허비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의 건축물에서 대지진을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시공된 건축물의 기념비로 인식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괜찮고 환경이 괜찮으면 우리는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면목은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오고 상황이 힘들어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처한 환경이 힘겨워지고 상황이 어려워질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진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십니다.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 말씀 위에 설 때에만 우리는 아전하고 튼튼한 집, 어떤 어려움에도 든든한 집을 세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사탄의 거짓을 멸하고 시험을 이기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3:16-4:11 / 마가복음 1:9-13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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