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 제 인생을 돌아보니 딱 한 가지로는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의 딸이었고, 한 명의 오빠와 두 명의 언니의 동생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많은 벗들의 친구이자 학생이었고, 결혼을 해서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한 가정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많은 조카들의 이모이자, 고모이자, 숙모가 되었고, 또 양문교회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원생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녀가 있었다면 “***”의 엄마로 불리어졌을 것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의 할머니”로 불리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시시때때로 변화되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때로는 가슴 벅차게 힘들 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나 자신을 정의할 때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 혼자서 규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또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어집니다.
엄마 아빠라는 기준, 언니 오빠라는 기준, 남편이라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또는 신월동이라는 거주지, 학교, 직장이라는 기준을 통해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냐가 바로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신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아무 때나 불쑥 떠오르는 주제는 아닙니다. 물론 매일 마다 “내가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시는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내가 누구인가?’ 라는 이 질문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나, 도저히 풀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에 우리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둘러싸여 고민하며 방황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한 모세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답을 찾는 삶을 살아갑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급속히 증가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히브리인 산파들을 불러 해산할 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바로의 명령에 불순종하자 급기야 바로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명령을 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부모들은 얼마나 두려움과 불안 속에 있었겠습니까? 모세의 부모는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자인지 알아보고는 그를 석 달 동안 숨기다가 더는 불가능해지자 그를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가에 떠나보내게 됩니다. 마침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딸에 의해 모세가 발견되어지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젖을 먹고 성장하기까지 그의 친모인 요게벳의 품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애굽의 궁전으로 돌아와 바로 딸의 아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세의 삶은 참으로 기구한 삶입니다. 그는 두 명의 엄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의 엄마인 요게벳과 애굽 바로의 딸, 그리고 그는 당시 히브리인의 피줄인 노예의 신분으로 출생했지만 그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애굽 나라의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풍요롭고 부료한 곳에서 성장했을 터이지만 모세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애굽의 왕자로 여기기보다 노예에 불과하지만 히브리인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의 상황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출애굽기 (2:11~14)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최대의 문명국이었던 애굽에서 교육을 받고 왕자로 섬김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밖에 나가서 당시 노예로 애굽을 섬겼던 이스라엫 백성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들을 자기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비록 애굽 왕자로 살지만 스스로는 히브리인임을 인식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의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어 둡니다. 그에게는 자기 동족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함이 있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논가 있었습니다. 또한 친모인 요게벳의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들어왔던 모세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모세는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위험까지 무릅쓰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자신을 따를 것이고 자신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모세의 생각대로 풀려가지 않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 싸움에 끼어들어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라고 꾸짖게 됩니다. 그러자 그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말을 합니다.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쳐 죽었고, 그 정도로 했으면 당연히 히브리인들이 자신을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히브리인들은 그를 외면하고 거절하고 히브리인들을 위해 엄청난 결단으로 행한 모세의 행동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형제라 믿었던 히브리인들은 자신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었다는 사실이 탄로 났으니 애굽 사람들 역시 자신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신을 적대시하고 죽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왕 역시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고 있었고,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도, 애굽인들에게도 동족도 아니었고 형제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외로운 나그네였을 뿐이었습니다.
애굽 왕실에서 자랐지만, 한 번도 스스로를 애굽 사람으로 여긴적 없고, 당대 최고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애굽의 왕자로 자랐지만, 한 번도 히브리인의 고된 형편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들이 진정한 자기 형제들임을 잊지 않았으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히브리인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하려했건만 히브리인들에게는 결코, 자신들의 동족으로 여김을 받지 못했던 모세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성취하려 했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힘과 권력을 다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기꺼이 이루고 싶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는커녕 애굽 사람에게도 버림받고 히브리인들에게도 버림받는 신세가 되어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 자신의 몸을 숨겨야 했던 모세,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모세와 같이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속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된 경험들, 내가 믿었던 사람들,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적의 편으로 간주하여 정죄당한 경험들, 누군가를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경험들, 진정 내가 속해야 할 곳, 진정 나를 받아들여 줄 곳을 찾지 못해 외로운 도망자처럼 처량한 신세로 살아왔던 경험들, 나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더 망쳐 버린 것 같은 경험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경험한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모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외로운 나그네에 불과할 뿐입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도무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외롭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광야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랬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서의 모세의 삶은 혼돈스러웠고,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안하고 외로운 도망자의 삶이었지만 그 모든 삶의 과정은 그가 진정 속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 그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실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굽 사람도 아니었고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히브리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와 반대로 두 곳 모두에 속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 속해있든 진정한 평안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과 히브리인들로부터 거절당해 외로운 나그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친 곳은 미디안 광야라는 외롭고 공허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인들도 아니고 히브리인들도 아닌 그저 광야에 살고 있는 미디안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모세를 연결시켜 준 것은 애굽의 왕자라는 그의 신분도, 그의 권력이나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부어주신 특별한 마음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고통 받는 자, 힘없는 자,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을 향한 긍휼함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고, 또한 목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여인들을 돕기 위해 일어나 싸웠습니다. 모세에게 있던 약한 자들을 향한 긍휼, 그리고 강한 압제자들을 향한 분노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대한 애굽으로부터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낯설고 외로운 미디안 광야에서 그가 안식처를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통로였습니다.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2: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2: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살아지는 것이 인생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하신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비록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양들을 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애굽에서 배웠던 화려한 학문과 학식도 그곳에서는 필요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입었던 화려한 왕자의 옷은 거추장스러운 천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40년에 걸쳐 양을 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장인어른을 돕고 가족을 건사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젊었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다는 당당한 패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만 그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이름도 없이 목자로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그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위해, 그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펼쳐질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며, 이 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철저한 나그네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다. 그가 떨기나무의 불이 붙은 광경을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긴 시간 모세에게 그 자신이 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시며 가르치시던 그 시간에 확실한 그의 정체감을 가르치시게 하기 위하여 다가오셨습니다.
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모세는 장인의 양떼를 치다가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상히 여겨 가까이 가서 보려는 동시에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근심을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 것은 모세가 젊은 시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행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긍휼함을 가지고 있으셨던 것처럼 모세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때리는 애굽인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그 선한 마음을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할 때에 실패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어놓으신 선한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긍휼함, 나누는 것을 기뻐하는 것,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것, 거룩한 분노, 진리를 향한 열심 등 우리에게 심어 놓으신 선한 것들을 풀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게 하십니다. 단 조건이 있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방법이 아닌 철저히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방법으로 풀어놓게 하십니다.
세째,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매인 사람이었고 도망자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초라한 나그네로 전락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외로운 마음에 있는 사람, 오랜 시간동안 소소한 일상에 매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가난한 마음에 있는 사람,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가 도망 왔던 애굽으로 다시 바로에게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도망하고 회피했던 곳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그러나 이제 혼자 보내시지 않습니다. 홀로 그 힘든 시간을 견디라고 떠미시지 않습니다.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 모세가 반문합니다.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모세는... 자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보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기능과 역할은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확실한 기초 없이 올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정체감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답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답으로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명백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동문서답과 같은 하나님의 대답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깊은 뜻이 숨어있음을 우리는 발견해 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오직 나와 함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한 창조주이고, 오직 너는 나와의 관계 안에서만 네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며. 진정한 너의 존재를 알아갈 수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질문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은 모세의 정체성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창조주시고 모든 창조물들은 그 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분명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정체성은 내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누구와의 관계 없이도 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자이다. 왜냐면 모든 인간과 모든 천지만물들은 그들의 진정한 창조자인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나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주는 존재러서 절대적인 기준이다. 나는 그 누구와의 관계없이도,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절대자이다."라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세상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절대적인 기준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들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친절하시게도 모세에게 그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정체감을 찾고 깨달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들이 가졌던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감을 기억하면서 모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계를 통해 그들에게 부여하셨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정체감을 모세를 비롯한 모든 자에게 영원히 부여하실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우리 자신을 찾아가야 하지만 타락된 세상에서 어둠의 영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진리가 아닌 많은 속임들을 진리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표현할 때 다른 사람들과 또는 우리가 존귀히 여기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 혹은 어떤 특정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자로 불리워지길 원합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들이 있는 위치로 그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신을 누구의 엄마로 불려 지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요소들로 믿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진정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들과 연관지어 자신을 설명하기를 원하며, 그럴때만 자신의 정체성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믿음가운데 있기 때문에 진정 자신이 누구이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닌..그들이 관계 맺기를 꿈꾸고 있는 어떤 대상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 나가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매일의 불안과 염려가운데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느끼게 하고 사랑 받게 하는 것들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자신이 관계맺기를 소원하는 그 어떤 대상이 자기에게서 사라질까봐 걱정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돈이 그들의 지위가 그들의 자녀가 그들로 하여금 진정 사랑 받고 있으며 가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과의 강한 관계를 설명하며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사랑에 굶주려 있고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여기지 못하는 자신 안에서의 싸움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은 바로 우리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이 세상안에 있는 그 무엇과의 관계가 아닌...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하실 수 잇는 분이시며, 우리 존재의 진정하며 절대적인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길...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분 안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것 우리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는 더 이상 사랑 받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가치 있는 존재로 여김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딸과 아들로 부르시고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는 마음이 공허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랑에 대해 갈급해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그 마음의 갈급함을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가치있게 만드는....그래서 자신이 좀더 의미있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질 수 있다는 헛된 속임에 빠져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제 절대적 기준이 되신 하나님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진정한 정체성의 회복을 위해 나가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모세가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완수하였던 것처럼...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을 우리는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진정한 관계...거기에 우리 존재와 목적의 진정한 출발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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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그는 비로소 가난한 마음으로 그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은혜에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를 만드시고, 그를 아시며, 그를 향해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혼돈된 정체성으로 살아가던 모세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 속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에만 매인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보다 더 크고, 교회 공동체를 초월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을 때까지 세상에서 애쓰고, 교회에서 수고하며, 쉼 없는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과감히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애굽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세처럼, 어쩌면 모세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히브리인들에게 속하려고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방법과 힘을 의지한 그들의 애씀 때문에 그가 속하려는 공동체에서 더 버림을 받고 더 외로운 고립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침내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에 떨며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깊은 고뇌와 연단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힘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존재로, 자신의 방법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자로, 자신의 명철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자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께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내린 자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모세를 빚으신 것처럼 그 분의 손에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약한 자를 돌아보는 긍휼의 심정이, 불의에 대항해서 일어나는 강렬한 분노가, 마침내 고통으로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됨 같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마음과 은사를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계획과 뜻을 신실히 이루어 가신다.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마음과 은사는 결국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은사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흔들리고 혼돈된 삶을 살고 있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실패하는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주지 않는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가? 세상의 권력과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여전히 마음의 공허함으로 방황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 있는가? 그렇다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손안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는지, 모세를 통해 자신의 뜻을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참으로 난감한 주제입니다.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만드시고 창조하신 하나님께 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알 수 없고, 나는 나의 목적도 알 수 없고, 나는 어떻게 지어졌는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묻는다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만든 창조자, 하나님의 영역에서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시계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를 시계답게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계를 처음 만든 사람에게 가서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래서 시계를 처음 만든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면 비로소 우리는 시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만든 목적에 맞게 그 시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할 때에만 비로소 시계가 자신의 기능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의 고민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내릴 수 있는 정의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비로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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