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PKa_x9_Y6D8
제목 :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하갈을 살피시는 하나님)
말씀 : 창세기 16:1~16
배우 설경구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박하사탕]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순수한 청년이었지만 5.18 광주 사태를 겪으면서 공안 형사, 고문 경찰이 되고, 그 와중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지만 사업이 망하고 사기를 당하고 사채를 쓰다가 부인한테 버림받게 됩니다. 인생의 실패와 절망의 끝에서 그는 다시 순수했던 청년의 시절,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품고 기찻길에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그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처한 비참한 현실의 삶에서 도망가고 싶다고 절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에게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무거울 때 우리도 가끔씩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 그 장소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우리에겐 또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장소가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고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로웠던 시절, 너무 고생을 하고 힘들어서 다시 돌아가면 죽을 것만 같은 그 때, 그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장소가 있으십니까? 만약 있다면 언제, 어디입니까?
저는 종종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가고 싶어요?” 그러면 남편의 대답은 늘 한결같이 “안 돌아갈래. 난 지금이 제일 편하고 좋아.”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남편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가고 싶어요?” 그러자 이번에 처음으로 남편의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산에서 떨어져서 다치기 전으로..” 남편의 대답을 듣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아프다고 말은 안 해도, 힘들다고 말은 안 해도 다친 이후의 삶이 남편에게 많이 불편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겠죠.
오늘 본문 말씀에는 자신의 삶의 자리가 너무 버거워, 죽을 것 같아서 살기위해 광야로 도망쳐 나온 여인, 하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갈을 찾아와 만나 주시고, 그녀의 신음을 들으시고 고통을 보시며, 그녀의 삶을 살피시던 하나님, 또한 그녀에게 약속을 주시고 힘을 주셔서 다시 그녀가 돌아가야 할 자리, 서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은혜를 누리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번성시켜 주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했던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펼쳐집니다. 사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출산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할 정도로 출산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과 방법을 더 이상 인내하며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신 후 10년이나 지났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할 만큼 긴 시간이고, 아마도 그녀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브람과 사래는 나이가 들어가고 자녀를 출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지기 때문에 그들은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지쳐갔을 것입니다. 결국 사래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려야겠다는 어찌 보면 참으로 교만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온전한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과 인간의 계획이 끼어들어오자, 결국 아브람의 가정에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서 큰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본문 말씀 창세기 16장 2절부터 6절까지 말씀을 보면 사래와 그녀의 여종 하갈과 아브람 간에 빚어내는 갈등과 분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는 자신의 형편을 남편에게 토로하면서 자신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남편과 동침시켜 자녀를 얻을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에는 여종이 출산을 하면 그 아이를 여주인의 자녀로 삼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래에게 하갈은 자신의 원함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고 도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갈은 그런 여주인 사래에 의해 아브람에게 첩으로 내어줌 바 되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됩니다. 사래의 계획처럼 하갈은 임신에 성공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사래의 생각대로 진행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갈이 자신이 임신함을 알게 되자, 그의 여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여주인의 마음대로 살아야했지만, 임신을 하게 되어 힘이 생기자 하갈은 자신의 정체성 망각하고, 의기양양하고 교만하게 여주인 사래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없을 때는 굽실굽실하다가 힘이라도 생기고 부요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래는 모든 문제와 고통이 아브람 때문에 일어났다고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앞세웠던 아내 사래의 말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래의 비난과 추궁 앞에서 하갈을 학대하도록 부추기고 방관하고 있습니다. 사래의 악한 행동을 허용하고 묵인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하갈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긍휼함이 없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이 어떤 상처를 받든 그녀보다 자신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두 여인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가만히 읽다보면 하갈, 사래, 아브람은 모두 연약하고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사람들의 관계 사이에는 인간의 악함이 서로 서로 뒤엉켜 상처와 고통과 분열과 갈등을 남기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과 같이 실상 우리도 누구하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거나 온전하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역시 그들의 모습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고통스러워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다른 이들의 악함을 꾸짖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방관하는 모습, 나만 상처받지 않고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모습,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에 무감각한 모습은 없습니까? 하갈처럼 약할 때는 죽은 듯이 있다가 힘이 생기고 지위가 올라가고 권력이 생기면 가차 없이 다른 이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한 모습은 없습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사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한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내 생각을 앞세우며,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의 마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하나 없고, 언제나 자기 욕심과 유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며 수단과 도구로 삼는 독선과 잔인함은 없습니까?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남을 탓 하며 감정에 따라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학대하는 악함이 우리 안에 없습니까?
결국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가난과 같이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는 곳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서로 서로의 관계 안에서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고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의 상함이 있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곳,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곳일 겁니다. 더 있다가는 우리가 탈진하고 죽을 것 같은 암담하고 답답한 곳일 겁니다. 그곳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갈이 도망한 것은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래의 잔인한 학대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16장 6절 하반절을 보면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갈이 도망한 것이 전적으로 사래의 잘못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임신했다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던 하갈의 교만함도 한몫했고, 그것이 사래의 학대를 유발한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도망 나왔습니다. 사래에게 받은 학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이것만 봐도 사래의 학대가 참으로 잔인했음을 추측하게 하지만, 어쩌면 그런 고통 가운데 있는 하갈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하갈의 편을 들어 주지도 않고, 누구하나 사래의 학대를 멈추게 하려고 잘못을 꾸짖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하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더 크게 무너지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게 한 아브람도 하갈을 향한 사래의 학대를 방관하고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하갈에게 그곳은 철저하게 외로운 곳이었고, 고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더 이상 있어야 할 의미도 없고,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곳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그곳을 피해 살기 위해 도망한 곳이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대개 건조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의 땅입니다. 그 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어느 것 하나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살기 위해 나왔지만, 오히려 도망친 곳, 광야에서.. 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갈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가여운 여인이었습니다. 어디에서도 누구하나 그녀를 따스하게 보호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돌봐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버려졌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하갈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깊은 어둠 속, 의지할 것 하나 없는 그 외롭고 광활 한 광야에서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모든 삶을 유의하여 보셨습니다. 그녀가 겪는 모든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들었고, 그녀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그녀를 찾아와 만나주셨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역시 하갈처럼 고통 속에 있을 때, 고난 속에 있을 때, 아무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절망 속에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비로소 그녀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삶의 순간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세기 16장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그러자 하갈은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가 잊고 싶어 했던 “사래의 여종”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16장 9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가 다시 돌아가야 할 삶의 자리, 지키고 살아야 할 자리,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녀의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 나왔습니다. 살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도망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녀에게 그녀를 학대하던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녀의 수하에서 복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 곳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죽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교만이 꺾이고 자기의가 꺾이는 자리입니다. 그녀의 옛 자아가 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살기 위해 도망쳐 온 그 자리로 그녀는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돌아가야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죽고, 자신의 감정이 죽고, 자신의 자아가 죽고, 자신이 옛 생명이 죽는 그 자리로 돌아 가야했습니다.
하갈, 그녀는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여주인 사래의 수하에서 복종하는, 그 자리로 돌아갔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래의 여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본문 말씀 창세기 16장 15절 말씀을 보면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갈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시 그녀의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브람을 통해 “이스마엘”이라 짓게 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다시 돌아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은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살기위해 도망가야 했던 그 자리, 자신을 학대하던 여주인 사래의 수하로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광야에서 자신을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 외롭고 척박한 광야에서 자신을 아시고 살피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견딜 수 없는 곳에서 이제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고통과 상처로 무너지고 깨어지는 연약한 자였으나 이제는 고통과 상처를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그 분을 더 의지하는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혼자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으나, 이제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그곳으로 이제는 용감하게 돌아갈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힘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 13절을 보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광야에서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갈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상황을 계속해서 살피시고 주목하여 보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서 홀로 전전긍긍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자신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삶의 방향을 알게 하심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늘, 항상, 언제나 하갈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래의 학대를 받을 때에도, 광야에서 홀로 떨고 있을 때에도 항상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광야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만난 곳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브에르 라하이 로이”인데 “브에르”는 “샘물”, “라하이”는 “살아있는”, “로이”는 “살피시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물”이 됩니다.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갈증을 해결해주는 샘물이듯이 하갈은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유일한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갈증을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인생이 살아있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임신한 하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태중에 있는 아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그녀의 여주인 사래의 수하에 돌려보낼 때,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들을 향한 약속을 주십니다. 창세기 16장 11-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그녀의 태중의 아이는 아들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이스마엘”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시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던 광야에서 만나주신 살피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녀의 신음과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던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그녀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게 했고, 마침내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되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자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망가고 싶은 곳일 수도 있고, 고난이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 그 자리에서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보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믿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겨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그 사랑의 하나님, 살피시는 하나님에게 힘을 얻고 그 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삶의 치열한 자리로 돌아가 다시 살아내고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나 다시 사래의 수하로 돌아간 하갈처럼, 우리의 모든 상황을 살피시고 아시며 우리의 신음과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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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1-16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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