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엄청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 왜?”
참혹한 전쟁이나 재해, 사고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서로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거나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토로한곤 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일어나게 했냐고? 이것이 바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확신하며 한껏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때는 두렵고 또 어떤 때는 불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큰 재앙이나 사건 앞에서 극단적으로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많은 혼돈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때에는 이들의 생각에 동조할 때도 있고, 또 저들의 소리에 동조할 때도 있고, 또 반대로 그들의 소리에 왠지 모를 반감을 갖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과 재난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곳곳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살려달라는 애원의 소리, 신음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뉴스를 통해 그 참담하고 잔혹한 현장을 보고 듣지 않는 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통하고 황폐한지를 말입니다.
얼마전 ‘옥스팜’과 '세이브 더 칠드런', '월드 비전' 등이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의하면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4초마다 1명씩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갑니다. 세계적으로 3억 4500만명이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코로나 19전, 2019년보다 2배로 늘어난 수치라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는 박해, 전쟁, 테러, 극도의 빈곤, 기근, 자연재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망명해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난민들이 전 세계적으로 1억 명을 돌파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8930만 명 정도였으나 올해 12%가 급증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수많은 피란민들이 발생했고, 내전 등으로 고향을 등진 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지속해서 발생하는 점도 한 요인으로 이야기 되었으나 어쨌든 난민은 계속 증가하고 있고, 10년 전보다는 갑절로 증가했습니다. 결국 세계 인구 80명중 1명은 난민인 것입니다. 고향을 잃고 집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입니다.
또 전쟁은 어떠합니까? 현재 세계에서 분쟁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국가나 지역은 대략 26곳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탈레반이 장악한 후 내전이 이어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와 정부 간 전쟁이 벌어지는 미얀마, 그리고 예멘과 레바논, 에티오피아, 시리아, 수단, 소말리아, 콩고공화국 등도 수년째 내전 중인 국가들이고 엄밀히 따지면 정전 협정을 하고 휴전상태인 우리나라도 전쟁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계속 북한의 미사일로 전쟁의 위협을 누끼고 불안해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전쟁이 있는 곳을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집들과 건축물들이 파괴되어지고, 여기저기서 폭탄들이 터지고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불안해합니다. 어린 아이들과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그야말로 죽음의 한복판이 바로 전쟁터의 참상입니다. 세상이 조용한 것 같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전쟁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올해만 전쟁과 분쟁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이 거의 3만명에 이릅니다.
또 재난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으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 뿐아 아닙니다.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는 유례없는 한파와 폭설이 일어났고, 아마존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산불과 폭발 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이클론과 태풍과 폭우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모든 자연은 초토화되고 황폐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제외되지는 않았습니다. 거대한 산불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집중 호우로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굶주림, 난민, 전쟁과 분쟁, 자연 재해와 수많은 사건, 사고의 문제들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으면서도 때로 우리와는 멀리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고통의 현장과 재난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우리는 그 한 가운데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건 우리는 굶주림과 전쟁과 재난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의 소리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의 한 가운데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엄청난 비극의 사건이나 재해나 사고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삶의 고난과 뉴스에서 매일 쏟아지는 참담한 사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혼돈스러워하고 그 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평화롭거나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고통과 엄청난 사건과 사고가 일상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10월 29일,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우리는 참으로 애통한 일을 마주했습니다. 156명의 젊은이들이 압사당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앞에서 말씀드린 양상과 같았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에도, 지진과 태풍과 해일과 집중호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재난의 현장을 바라보면서도, 전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양상으로 반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재난과 비극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할러윈 데이”의 유래는 기원전 약 500년 전 아일랜드 켈트족의 “죽음의 신”인 “삼하인”축제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그 영혼이 1년 동안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머물다 떠난다고 믿었던 켈트족은 새해 첫날을 11월 1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한 해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에는 태양의 기운이 다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는 장막이 얇아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죽은 사람의 영혼들이 앞으로 1년 동안 기거할 사람을 택하러 온다고 생각했고, 그 죽은 영혼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귀신이나 유령, 흡혈귀, 해골, 괴물 등의 복장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해 악령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이 할로윈 복장 문화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 결국 켈트족의 “삼하인” 축제에서 유래된 이 할로윈 데이는 영국 등 북유럽과 미국에서 10월 31일 귀신분장을 하고 치르는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할러윈 데이에 기괴한 옷차림인 코스튬을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사탕을 받으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할로윈 축제 때 곳곳에서 많은 행사가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할로윈 축제하면 이태원을 떠올릴 정도로 이태원 할로윈 축제가 유명해졌습니다. 올 해는 특히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 예상되었고, 실제로 10월 29일에 엄청난 인파가 이태원에 몰려들었습니다. 악령과 귀신, 마녀들의 의상을 입고 분장한 사람들로 거리는 넘쳐났고,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재미를 삼아 그 곳에 갔고, 누군가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오락거리를 찾아 그곳에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할로윈 축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처리할 일이 있어서, 또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 곳에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았지만, 그 곳을 찾아간 그 이유와 목적은 각 사람들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압사되어 죽음에 이르는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나라 전역 뿐 아니라 전 세계는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로 휩싸였고,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에서도 사건이 일어난 당일, 뉴스를 보고, 자녀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며 좌불안석이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몇몇 연락이 안됐던 분들은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신 분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비통하고 참담한 사건을 대할 때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비통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총독으로 부임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중 몇을 죽여서 그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일은 너무나도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의 생각 역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죄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저주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처럼 잔인하고 모욕적으로 죽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명백한 증거도 없이 비참한 죽음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엄청난 죄를 지은 죄인으로 낙인찍어버린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은 다른 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당시에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갑작스럽게 열여덟 사람이 치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져 온 것입니다. 그 당시 또한 많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망대가 무너져 끔찍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큰 죄인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들을 큰 죄인으로 취급했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하나님의 저주이고 심판이라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의 생각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 말씀 13장 2~3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3장 4~5절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끔찍한 사건과 갑작스럽고 비참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행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건이나 사고로 죽은 자들이나 지금은 생명을 유지하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죽음과 멸망과 파멸의 한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큰 죄인이고 누가 더 거룩한 의인인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모두가 동일한 지인이고, 모두가 회개가 필요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고,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한 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더 의롭거나 더 잘났거나 더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당한 갑작스러운 고난과 문제와 고통은 그들이 우리보다 지은 죄가 더 많다거나 더 악하거나 더 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참된 회개가 없다면 진정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죽음과 절망의 벼랑 끝에 선 자들일 뿐입니다.
남편이 7월 28일 그 무더운 날, 북한산을 산행하다가 15m에서 낙상해서 엄청난 골절을 당하고, 골절된 경추 부위가 붓게 되면 기도가 막힐 수 있어서 중환자실에 들어갔었습니다, 또 신경과 척수가 지나는 경추의 신경궁 부위가 골절되어 어쩌면 전신마비로 살아갈 수 있는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고, 그 기도의 요청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 날라져서 저희가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사람들의 기도를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당시 어떤 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게 맞나요? 어떻게 목사님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많은 분들은 이 엄청난 사고 앞에서 너무 두려워 전화 한통 할 수 없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전화를 주시는 분들은 “말은 하나요? 손가락 발가락은 움직이나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어쨌든 기적적으로 골절된 부위가 붓지 않아 중환자실을 하루 만에 나오고, 또 골절된 모든 뼈들이 장기나 신경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치료를 하고 진료를 하러 들어오는 의사들마다 “이건 기적입니다.”라고 찬사의 소리를 쏟아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서 이런 기적을 경험하시나 봅니다. 나도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착하게 살라고 한 번 생명을 주셨나 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다 달랐습니다.
남편은 당시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적적으로 회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사고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온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이번 사고를 통해 깨달은 것은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야. 숨을 쉬는 것도, 걷는 것도, 움직이고 밥을 먹는 것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인거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숨을 쉴 수도,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그냥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인거지. 그것이 내 진짜 모습이야.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적인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이 실상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 분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야.”라고 말입니다.
엄청난 사고와 사건과 재난을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난의 한가운데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의롭거나 거룩해서 우리는 이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비참한 일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비참하고 참혹한 고통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엄청난 기근과 재난과 전쟁과 분쟁과 사건과 사고 앞에서 우리가 질문할 것은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를 묻기에 앞서 “하나님 왜 저와 같은 자에게 이 엄청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왜 저에게 다시 사는 생명을 주시고, 기적을 베푸셔서 오늘을 이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하십니까? 하나님 왜 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끊임없이 전쟁과 분쟁, 끔찍한 사건과 사고, 굶주림과 고통이 일어나는 이 지옥같이 황폐하고 암담한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지금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고통으로 울부짖고 신음하며 이 땅에서 두려움과 불안함 없는 삶을 단 하루도 단 일분도 단 일초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사건을 겪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언제 그런 비참한 사건과 사고 앞에 설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었던 그 고통과 신음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고, 그들의 상처와 아픔이 바로 내가 느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모두 멸망과 죽음의 길을 걸고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전쟁과 분쟁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 비참한 사건과 재난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 비참하고 암담하고 고통스럽고 공포스런 상황이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지금 전쟁에서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사 당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CPR)에 나섰던 한 의사가 참혹했던 사고 상황을 전하면서 ‘이태원 현장에서 끔찍했던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그 글에서 “그 와중에 가장 끔찍했던 것은 가지 않고 구경하던 구경꾼들”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앰뷸런스에 환자가 실려 떠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CPR 하려고 서있는 앰뷸런스 뒤에서 물을 잠시 마시는데 지나가는 20대가 ‘홍대 가서 마저 마실까?’하고 말하는 걸 듣고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몸서리가 쳐졌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는“아무리 CPR을 해도 맥박이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을 보며 무능한 의사가 된 듯한 기분도 끔찍했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다음 술자리를 찾던 그들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태원의 사고 현장은 사람 죽어 나가든 말든 춤추고 노래하는 광란의 도시였습니다. 한 쪽에서는 압사 사고로 숨을 헐떡이며 길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고, 곳곳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CPR)을 시도하는 소방관과 시민들이 있었지만, 반대로 그 옆엔 떼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클럽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있음에도 술을 마시고 음악을 더 크게 틀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경찰이 소방차의 진입을 위해 해산하라고 말하자 일부 시민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현장을 구경하는라 바빴고, 어디서 술을 마시라는 거냐며 따져 묻는 취객들도 있었고 일각에선 유투버들이 그 모습까지 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모포나 옷가지로 얼굴을 덮고 있는 사망자들을 거침없이 찍어댔고, 한쪽에선 코스프레 차림을 한 사람들이 웃으며 사진 찍고 있는 진기한 풍경도 이어졌습니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즐비한 곳에서도 비누방울을 뿌리며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이번 이태원 압사 사고는 더욱 참담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반면 사고 발생 이후 현장에 투입된 소방대원들, 그리고 손발을 걷고 그들을 도우려고 나섰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죽음의 위기에 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부상자를 옮기고 심정지 환자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하며 고된 밤을 보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곳에 있었기에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생명을 건지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하는 주한미군 자밀 테일러(40), 제롬 오거스타(34), 데인 비타드(32)씨 역시 그 참사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린 영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죄와 고통이 버물려져있는 죽음의 아수라장 그 자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오늘도 평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무감각하시고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이 단어는 “com+passion”입니다. 여기서 “com”은 함께 라는 뜻이고 “passion”은 “수난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시는”긍휼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와 고통으로 절망뿐인 이 죽음의 세상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살게 하는 생명을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남편이 북한산에서 낙상할 때, 그 모습을 지켜봤던 친구 목사님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박철효 목사님이 산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나도 그렇게 다쳐서 같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감사하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구급대원을 부르고 연락을 취했지만 말입니다.” 목사님은 박철효 목사님을 구하기 위해 내려올 수 없는 길임에도 급하게 내려오느라 팔목이 부러졌지만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은 이런 것입니다.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기에 자신의 아픔은 감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이 내가 가지 고통 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민감하셨고 공감하셨기에 이 지옥 같은 죄와 사망의 한가운데서 고통 하는 우리를 그냥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무감각하고 그저 그들의 고통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웃는 자들과 함께 웃습니까?
누가복음 7장 32절의 말씀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아니하는 자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의 무감각하고 죽어 있는 심령이 다시 감각하고 살아나는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긍휼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를 생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참한 재난과 사건과 전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왜 이런 일을 일으키십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라고 겸손히 물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과 아픔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긍휼의 심령으로 품고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자들, 하나님의 은혜에 매순간 감격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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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1-5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7:31-32
(7: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7: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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