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아노라.
본문 : 창세기 22:1~19
누구를 진심으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간도 쓸개도 다 빼주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뒤통수를 치는데 가장 앞장을 서기도 하고,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는데 가장 어려운 순간, 누구보다 먼저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어,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을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이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모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예기치 않은 환경 속에서 튀어나오는 자신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대견해 하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생각하며 스스로 실망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다른 사람이든, 우리 자신이든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진정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앎에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 아는 바 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을 안다고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아노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아들을 기꺼이 번제로 잡아드리려 했던 사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순종으로 드러나고 표현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이제야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께 아는 바 된 사람이 되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일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일은 어떤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창세기 21장에 기록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백세 때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근심 속에서도 “이스마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방인인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향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에서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가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대한 믿음의 첫발걸음을 내딛었던 그였지만,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오고 삶에 곤고함이 찾아오자, 그는 약속의 땅을 버리고 물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갔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면서까지 자기 생명을 지키려 했던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짓이 탄로 나면서 이방인들에게 비난과 꾸지람을 듣던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식을 얻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인간의 방법으로 자식을 낳았던 불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21장에서 보면, 그의 믿음은 놀랍도록 성장했고, 성숙해졌고 견고해져서 이방인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그가 잘라서가 아니라,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삶에 매 순간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그에게 드러내셨고, 그럴 때마다 연약함 투성이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견고해져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향해 선포하셨던 자신의 언약을 모두 신실하게 이루어주심으로 그의 믿음을 끌어 올리셨습니다. 사라를 통해서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전적 무능함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전능함으로 이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모든 은혜와 기적의 일들로 인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장하고 성숙하고 견고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연약함 투성이인 존재입니다. 우리도 때로 비겁하고, 때로 야비하고 또 때로는 불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었고, 또 지금도 종종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분의 약속을 주시고, 또한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끊임없이 믿음의 여정을 걷게 하시면서 우리를 견고히 세워 가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잘남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이루어지는 기적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함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시험문제 하나를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시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22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그 믿음이 어느 수준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문제는 다름 아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 어쩌면 그의 전부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시험을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시험을 좋아하십니까? 아마도 시험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 간혹 시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시험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별종 중의 별종입니다. 이들이 시험을 기다리고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문제를 다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준비가 다 되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어쨌든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든 시험을 보고,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의 수준과 능력의 정도를 알게 됩니다. 요즘엔 학교에서도 시험을 보고, 학원에서도 보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시험을 봅니다. 영어로 시험을 test, 또는 examination이라고 하는데, 시험을 보는 목적은 그 사람의 수준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 점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그 시험의 난이도입니다. 시험의 난이도가 아주 낮으면 시험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만점을 맞게 되어서 변별력도 없고, 시험의 목적이 상실됩니다. 반면 난이도가 높을수록, 변별력이 높아져서 그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가 될 것이지만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의 수준은 정말 높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원하셨고,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 문제를 풀면서, 스스로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고 매 순간 그를 인도하시며 믿음을 성장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를 격려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번제로 바치라던 그 이삭, 그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입니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삭은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그의 나이 100세에 얻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입니다. 자식이 없어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낙심하며 말하던 아브라함,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 사라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던 조급한 아브라함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식을 기다리고 원했던 사람인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간절함의 끝네서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고, 늙은 자신에게 전부이고 모든 미래였습니다. 가진 모든 것은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니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더 주고 더 주어도 늘 부족한 것 같은 대상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삭을 위해서라면 많은 근심을 하긴 하였지만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도 집에서 내어 보낼 만큼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켜야할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고 가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 번 생각해볼까요?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집, 돈, 건강, 성공, 자녀, 가족?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 지켜야 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비로소 깨닫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쨌든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돈을 번 덕분에 건강을 잃기도 하고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와 대상을 지키기 위해 어떤 수고도,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평생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 그 것, 지금까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을 얻으려고 어떤 고통도 참고 견뎌왔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순종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곳에 이르는 삼일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을 향한 전적 믿음이 필요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흔적이 있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면, 그런데 그 순종에 고통이 따르고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며, 그 순종이 행함으로 드러나기까지 우리가 내적으로 얼마나 많이 갈등하며 생각에 생각을 뒤집으면서 흔들리고 요동합니까? 순종이라는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여정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매번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와 함께 왔던 종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삼일 동안 걸으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하나님 말씀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가장 외면하고 싶고 회피하고 싶은 순간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갔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난날의 은혜를 주마등처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에게 찾아오셨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셨는지? 그와 삶의 보폭을 맞춰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그를 안으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묵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디로 갈지 갈 바를 알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그에게 매 순간 길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애굽으로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자기 생명을 지키려했던 비겁한 그였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드러내시되 그의 생명을 친히 보호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친히 말씀해 주시고 그를 친구라 부르시며 그의 기도를 기쁘게 들으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는 무능한 자였던 그에게 친히 아들을 주신 전능한 하나님,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는 감히 제한 할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약속했던 언약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그 약속을 신실히 이루셔서 아들,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통해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만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모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이다. 불가능 속에서 아들을 주신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지금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이삭은 아직 결혼도 안하고 자녀도 없는데, 하나님은 이삭의 씨를 통해 후손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삭을 통해 낳은 자손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없지 않은가? 가만있자,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히 이루시는 분인데 그렇다면, 이삭은 자손을 낳아야 하니 지금 죽어도 다시 살아야 할 것이고, 그는 죽어도 죽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을 때 그의 믿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셔야 하기에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생각하고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그의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아 날 것을 믿었던 것이고, 그러한 믿음 없이는 이삭과 함께 종들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걷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 이삭을 향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하고 마침내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삭을 번제로 바칠 그 곳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이 반드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삭을 죽이고 각을 뜨고 불로 태우는 등 그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모든 과정은 결코 아브라함에게 쉬울 리 없었습니다. 이삭의 아픔을 고스란히 눈으로 마주보아야 하고 가슴에 담아야 하며,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가 겪어야 할 엄청난 무게를 그는 견뎌야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고통과 그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이 겪어야 하고 견뎌야 할 고통은 번제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삭의 고통보다 더 무겁고 힘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그 고통의 과정을 견디고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겐 가장 소중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을 주님 앞으로 가져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대상이 자식이었듯이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는 자녀가 가장 소중하고 지켜야 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나 성공,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이 될 수도 있으며, 쾌락이나 즐거운 오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그 분께 드리라고 했을 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순종의 매 순간 순간, 지나야 할 모든 과정 과정에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고 번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잡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그를 부르는 다급한 음성이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번제로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을 잡는 그 순종의 순간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이 삶으로, 행함으로 고백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자신의 전부인 이삭이라 할지라도 내어드릴 수 있다고 여긴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면서 확인되고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에 대한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 대상이 사랑의 대상일 때는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고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 고백은 듣고 들어도 질리지 않고, 확인하고 확인해도 매번 목마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면서도 우리의 믿음을 아시고 싶어 하고 자꾸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 독자를 하나님께 아끼지 않고 드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알게 되었다 말씀하시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이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시험지를 받고, 그 문제를 풀어내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을 드려야 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알기 원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 그 분이 부어주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 어떤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선택을 담대히 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잡으려던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시는 바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스스로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한 숫양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부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또 새롭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가장 복된 삶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음성이 다시 들려옵니다. 22장 15~18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 가장 소중한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라고 하나님께 기꺼이 내어 드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입니까? 아브라함의 소유를 갑절로 늘려주시겠다는 복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준 대가로 수많은 아들을 그에게 주시겠다는 복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이삭을 드린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이 얻은 당장의 복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시겠다는 복, 즉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확장시키고 번성시키겠다는 약속, 그리고 사탄의 세력을 멸하며, 그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진정한 복의 근원, 복의 통로로 그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를 드리면 두 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 하나를 투자하면 백 개를 얻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단지 그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라.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얻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 너의 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시고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부 못하는 사람을 가르쳐 주는 것, 돈을 많이 벌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자체가 복이라고 말씀하여 주는 것이 바로 주님이 말하는 복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보십시오. 빈들에서 허기진 무리를 돌려보내 각자 알아서 사 먹게 하라는 제자들과는 달리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작은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곳에 모인 모든 무리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먹을 오병이어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주님께 내어 드렸다고 그 아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거나 그 아이가 갑자기 부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그 곳에 있던 모든 자들이 배불리 먹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중한 것을 믿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가장 큰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우리의 순종과 드림을 통해 은혜를 누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순종이 우리에게도 있어지길 원합니다. 믿음의 순종을 통해 우리가 천하 만민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으니 내가 이제야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압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자로 그 사랑에 반응하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믿음의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아노라.”라는 칭찬을 듣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와 같이 진정한 믿음 또한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순종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그 분의 진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의 행함을 통해 우리의 진짜 믿음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그 믿음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만나고 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그 후에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게 됩니다. 서약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라고 이름한 브엘세바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해 여전히 신뢰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매 순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일상의 삶을 살아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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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22: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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