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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쓴 성경이야기

하나님을 아는 지식(2) : 호세아6장 1절~6절

 

호세아가 이 말씀을 기록한 시대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혼란과 어려움을 경험하는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르보함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는 경제적인 부요함과 막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과 부패함이 만연했고, 여르보함의 통치 이후에 급격한 정세변화로 이스라엘이 점차 파국을 향해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다른 이방민족들의 우상을 섬기거나, 다른 나라에 의지함으로 그들의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하려는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거짓과 우상숭배와 탐욕과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경험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눈에 보여 지는 헛된 것들에 의지함으로써 그들의 죄악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힘과 또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른 민족들에게 더 많은 신뢰를 두었고 그것들에 의존하는 부패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상황과 고통은 없어질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죄악과 부패는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라는 최악의 징벌로까지 그들을 이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호세아서가 기록된 배경이 됩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에 ‘알자’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됨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안다”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을 살펴보면, 친밀한 경험을 통해 상대방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혼한 부부가 서로 하나로 연합되는 행위를 통해 그가 또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경험함으로 친밀하고 섬세히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깊숙한 관계를 통해서만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알자’라는 단어가 강조되어진 이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기반이 그들 안에서 회복되어지길 바라는 호세아의 간절한 외침이고 도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자. 그리고 힘써서 그를 알자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드릴 수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과 친밀한 관계가 그들 안에서 회복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세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잘못된 오해와 관점들을  씻어내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지에 대한 지식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선택된 하나님의 민족임을 스스로 자부하며 교만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고자 하는 헛된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자체나 하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고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을 높이고 자신들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으며, 세상적 안위와 행복을 위해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정욕적 관점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마치 사자와 소가 상대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에서만 서로를 이해하고 행동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그들의 관점을 통해서만 알고자 했던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도록 그들을 미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거나 정욕을 채우지 못할 때 우리가 곧바로 그 대상을 떠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고통 중에 두시는 것은 그분의 욕구가 우리를 통해 채워지지 못해 우리를 떠난 정욕적인 행위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정욕적인 관점이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 그 하나님에게조차 제물을 바치고 예식을 치루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많은 것을 가져가고도 그분의 만족을 채울 수가 없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분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우리를 이 고통과 어려움 속에 쳐 넣으실 수가 있는가 말이다”

마치 사자와 소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상대방을 향해 내 밷었던 비난의 말들을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을 향해 내밷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마저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정욕적인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처해진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또는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소망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며 그들이 원하는 세상적인 행복을 빼앗아 가신 정욕적으로 비춰진 하나님이 싫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정욕을 채워주지는 않고, 그들을 이유 없이 꾸짖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하나님이 싫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족들의 우상을 섬기면서......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세상을 향한 정욕과 평강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 한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치셨다. 우리는 그토록 그분의 만족을 위해 노력했건만.... 그분이 우리에게 멸망과 재앙을 주려 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를 떠나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을 떠나는 하나의 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과 자신들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부패하고 정욕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는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하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소망과 장래를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말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민족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 징계의 고통마저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그 고통 중에서 아픔을 당하셔야 했고, 그들이 슬픔과 절망으로 울부짖을 때 그들과 같이 슬퍼하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지만, 하나님은 오직 그들에게 가장 최선의 것들을 주시고자 하는 절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그 자체이셨다는 것을 호세아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본질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를 향해 최선의 것을 주기 위해 완전히 헌신하셨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멸망당할 이 세상에 소망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더 좋아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우리는 죄를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아는 관멈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알지 못했던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으심으로 가장 큰 영광과 기쁨 또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셨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실 수 있던 것은 그분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어쩌면 사랑을 한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은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머무는 모든 곳에 사랑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하나님을 향한 관점을 올바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의 목적을 선포함으로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에 빠져도, 사소한 문제와 부딪혀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축복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나에게 축복하시지 않고 이러한 고통과 문제를 허락하신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고자 했던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분은 귀를 막고 계시는 것 같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모든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이제 나의 힘으로 나의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 그를 떠나 나의 지식과 나의 재능과 나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얻어가야 한다.’라고 결심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결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증거들이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비춰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 헌신된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보다는 정욕적인 바램을 무시하며 계속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떠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많은 우상과 거짓과 불신으로 파멸을 ID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되돌아 봐야 합니다.


두 번째,  호세아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세아가 두 번째로 알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들과 부딪히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기 위해 자신의 힘과 의지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다른 이방민족을 의지해보기도 하고 이방족의 우상들을 섬겨보기도 했지만, 그들이 처한 고통적인 상황은 없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인 평화는 상실되었고, 마음은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했으며 그들의 외부적 상황들은 더 심각한 고통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모든 일들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밖 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절대적인 기준이 HL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과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그분 자신의 말씀을 철저하고 분명하게 성취하며 이루어 가셨던 신실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아니 수 백 번 경험하고 겪어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대한 지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성품에 대하여 알지 못함으로 인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 밖 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변화지 않는 영원한 진리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만 했어도 그들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시며 신실한 하나님 안에서 내적인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만을 신뢰함으로 그들의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추며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그들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며 전락해 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에 처하였을 때마다 매번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조차 그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통해서만 올수 있는 “앎”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나가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진실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서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된 생각들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벽빛처럼 일정하고 신실하게 언약과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찾아야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고 날마다 동일하신 신실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건, 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건 상관없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며, 신실하게 그들을 향한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의 신실함을 요구하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이 가 임하리라는 언약을 다시한번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지하여 선포하고 잇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입니다

호세아가 가질 수 있었던 강한 믿음과 신뢰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체에 대한 깊은 경험을 통해 지속되어지는 그분과의 만남과 관계의 훈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었던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여러분을 향해 선포된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약속한 그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 믿음과 신뢰가 여러분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겪는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며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방법 저 방법을 시도하며 안간힘을 쓰고 계신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앎에 대한 지식과 끊임없이 지속되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 절대적인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여러분의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우리의 삶의 증거들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식을 드러내며, 그분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시며, 여러분 눈에 비취진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지식을 통해 그분을 섬기며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냄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신실하고 진실한 관계를 가짐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제물이나 동물의 제사를 통한 형식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섬김보다는 우리 마음의 중심과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추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생존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제물에 의존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그분께 속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제물을 바치든 바치지 않든,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사랑에 기반을 둔 우리의 중심을 더 가치 있게 여기시며,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섬김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앎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은 그 대상을 향해 달려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상에게 최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희생적 결단의 선택이며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인격적이며 진실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분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그에게 돌아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통해 그들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기꺼이 내어 주신 것처럼 그분 역시 우리에게 사랑받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지만 그들은 진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줄도 모르는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하고 하나님을 등지며 하나님이 가장 역겹게 여기는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었습니다.

호세아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과 신실한 성품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생각을 깨뜨리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진실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과의 거룩한 만남을 통해 그분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삶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성장시킬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최선의 것들을 그분께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랑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변함없으신 신실함을 붙잡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분을 향한 앎의 지식으로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도록 우리의 삶을 기꺼이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져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