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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쓴 성경이야기

땅 위에서 가장 큰 명령 :그리스도의 지상명령(2)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네 가지의 동사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라, 제자를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라.

그러나 이 단어들을 성경원문을 통해 살펴보면, 이 단어 중 핵심적인 동사형을 가지고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임을 알 수 있는데....그것은 바...로....“제자를 삼아라.”이다.

다른 나머지 세 개의 단어는 동사가 아닌... 동사를 꾸며주는 형태인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가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의 뜻은 ‘횡단하다’, 즉‘여행하다’, ‘떠나가다’, ‘(앞으로, 멀리, 뒤로)가다’, ‘걷다’ 등의 여러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어의 개역성경을 보면 “가서”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이를 보다 저 정확히 원본에 맞추어 번역하면 “가면서”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가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의 성도들은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의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두 세 사람씩 짝을 지어 그들이 담당한 구역의 가정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그들의 목적은 정해진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를 하기 위해 모인 이 사람들이 전도할 가정을 방문하기 위해 걷고 있는 길 위에서. ... 다른 교인들을 욕하거나, 서로에 대해 비방하거나, 불평을 하는 일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도할 대상의 가정에 도착하면(그 가정에 가서는) 아주 부드럽고 자상하고 사랑 많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목적지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종착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너희들은 가면서....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즉, 다시 말하면.......너희들이 (전도를 하기 위해) 가고 있는 그 집을 향해 가면서,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라..너희를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너희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라...너희가 한 걸음 한걸음 전도할 집을 향해 앞으로 나가면서 너희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제자 삼아라.. 

이 말씀은 마지막 종착지에 한정되는 않는다. 이것은 지속적인 진행이며 지속적인 확장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 목적은 그 대상에게만 국한되어지지 않는다. 그 대상을 만나기 위해 갈 때 부딪히는 모든 사람들과 그 대상이 속해 있는 모든 그룹들까지 확장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면서..우리가 숨쉬면서..우리가 걸으면서 만나게 되고 부짖히게 되는 모든 사람들..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관계는 없지만 어디서든지 나를 보게 되고 나에 대해서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까지 복음의 사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세례를 주라’는 것이다. 이 단어는 물로 ‘휩쓸다’(즉 완전히 ‘젖게  하다’), ‘세례를 베풀다’, ‘씻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를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피클 조리법’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피클을 만들 때, 처음 생오이는 끓는 물에 담겨진 후에, 식초 용액에 담겨진다. 즉 이 ‘세례를 주다’라는 단어는 식초용액에 담겨진 생오이에게 일어났던 이 행위에 관한 것이다. 오이가 처음 생오이였을 때, 그것은 금새 상하고 부패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이를 식초에 담가 둠으로써 이 오이의 본질은 영원히 변화하게 된다. 그것은 좀처럼 부패되지 않고 썩지 않는 것으로 그 성질 자체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세례를 주라.”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세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회에 나와서 몇 개월 후에 치러야 할 하나의 의식적 행사에 불과하다고 치부하지는 않는가? 예수와의 인격적인 연합 없이 단지 우리의 머리위에 깨끗한 물을 적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예식 중 하나라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일과 세례를 주는 일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큰 잘못된  인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세례는 부패되고 썩기 쉬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침투되어 우리 자신의 본질이 바뀌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예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변화되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본성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침투시키는 사람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생명의 본질이 완전히 부패되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썩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받도록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살펴볼 단어는 ‘가르쳐라.’이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하실 때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의 명령은 바로 이것이다.“너희가 복음을 가르칠 때 목적 없이 가르치지 말고, 그들이 지킬 때까지 가르쳐라. 가르침의 분명한 목적은 바로 지키는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침의 목적이 되는 ‘지키다’라는 단어는 ‘주의하다’, ‘유지하다’, ‘연장시켜서 억제하다’, ‘굳게 붙잡다’라는 뜻으로 그들이 가르친 것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가르침을 굳게 붙잡고 그 가르침 안에서 삶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도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가르침에 그렇게 헌신되어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조차 우리의 가르침이 그들의 삶 속에서 지켜지도록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너무 분주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쳤지만, 그들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어떤지 돌아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우리의 분주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잊혀지고 있고 말씀의 권위는 사라졌다. 교회안의 주일학교에서도 많은 교사들이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에서도 설교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르침에는 목적이 잇어야 하는데....그것은 바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것을 지켜내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목적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가르침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결코 그들의 삶을 바꾸도록 어떠한 도전이나 영향력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가르치는 은사를 자랑하기 위해 가르친다면, 당연히 직분을 맡고 있어서 가르친다면,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키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