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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쓴 성경이야기

마음의 투사체....언어(2)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말'의 사용에 대하여 주의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은 온전한 말을 통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뿐 아니라, 진정한 신앙은 반드시 온전한 말과 행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야고보는 이 서신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믿음과 신앙을 나타내는 온전한 말을 사용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말은 ‘말하다’, ‘발산하다’, 전파하다, (따라)이야기하다 등의 다양한 뜻이 내포되어있다. 즉, ‘말’은 우리가 처음에 살펴보았듯이 내면적 마음의 표현이며 발산의 도구이다.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생각과 의도만 있어도 시작될 수 있으며, 말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쩌면 말은 마음을  흘러나오게 한다‘라는 말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더 좋을듯 싶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행동보다도 ‘말’에 대하여 무심하거나 소홀히 취급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말’은 단지 강압적인 교육이나 의식적인 활동을 통해 변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내면적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만 바뀌어 질 수 있는.... 외적 통제 불능의 대상이라는데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정확하게 마음의 아주 작은 의도조차 표현해 내는 무서운 도구이며, 사람들이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에 비해 그것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본문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언급한대로 사람들이 가장 소홀히 취급하고 가볍게 표현하는 ‘말’에 대해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의 삶은 온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왜냐면 마음을 반사하는  ‘말’에 대한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말’에 의해 비춰진 그의 내면적 마음 역시 온전한 상태임은 증거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내뱉는 말은 많은 주의나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며....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말’은 단지 그들의 내면을 보여주고 표현하고 흘려보내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을 표현하는 혀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에는 다른 모든 몸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힘겨운 노력과 결단이 요구되는데... 그 이유는 온 몸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는데 더 많은 결단과 헌신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투영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투사체로 그가 가진 내면을 반사할 뿐..... 사람에 의해 길들여 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의 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이 먼저 다스려져야만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말을 표현하는 도구인 ‘혀’는 인간의 통제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인간에게 길들여 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왜냐면 ‘혀’의 통제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주권과 다스림에 의한 통제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진정한 통치권자의 승리가 바로 ‘말’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가져오며,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 받을 때에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온전한 말의 목적과 기능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 받고 복종되어져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길들이실 수가 있다.

말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된 마음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우리의 말은 자연스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이 ‘말’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야고보에 의하면 말을 표현 하는 도구인 ‘혀’는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악한 것을 표현하는 불의의 세계이고, 온몸을 더럽히는 도구일 뿐 아니라. 지옥 불에 그 근원지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께서도 야고보가 기록한 말씀에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셨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도 더러운 손으로 인간의 외면적인 육체를 더럽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들이 그들을 거룩하지 못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의 거룩함은 내면적 마음의 상태에 의해 존재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야고보의 말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정욕과 이기심에 근거하여 ‘말’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그의 더러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신의 마음에서 훼손시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더럽혀진 인간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와 고통주어 생명을 파괴시키며, 그로인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아래서 정죄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할 참된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야고보서3장 9절에서 12절을 마지막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인간의 정욕과 죄악된 마음을 발산하고 나타내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파괴시키고 멸망시키는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말’의 온전한 목적과 기능은 선한 것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야고보는 우리에게 희망과 도전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그는 우리의 입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하고, 또 그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저주함으로써 동시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한 입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일들을 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마땅하지도 않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즉, 그는 모든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과 아직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 없이 죄악된 옛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투영하는 ‘말’은 당연히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나타내는 수단이 될 것이지만, 아직도 마음의 새로운 변화없이 더러운 죄인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도 여전히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것으로 표현되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더러운 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듯 보여질 수 있겠지만, 그들의 마음과 중심을 보시며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관점에 있어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말’로 악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오 나타나는 모든 표현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연합된 진정한 신앙고 믿음은 그들의 변화된 새로운 마음에 의해 거룩한 언어로 드러나게 되어질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야고보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은 온전한 말을 통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뿐 아니라, 진정한 신앙은 반드시 온전한 말과 행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행함을 동반하다는 깊이 있는 신앙관을 통찰력 있게 기록하고 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거룩한 자들의 삶은 그들의 정결한 마음을 반영하는 ‘말’에 의해 투영되어야 하며, 그들의 거룩함을 반영하여 흘러 보내는 ‘말’은 단지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투영하는 ‘투사체’깉은 도구가 될 것이다.